페미니즘 리부트 10년,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벌거벗은 남자들]
하루살이처럼 살아가기 바쁜 현대 사회에 1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10년 전의 나는 얼마나 애송이였는지 돌이키기 부끄러울 정도이고 10년 후에 나는? 과연 생존해 있기는 할까? 10년 간 한 분야에서 공부하거나 일 한 사람, 무조건 리스펙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누군가를 성숙하게 하고 때로는 닳아 없어지게 하는 그 세월 앞에 페미니즘 대중화 물결, 즉 ‘페미니즘 리부트’도 있었다. 곳곳에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10년에 대한 회고가 나오는 이 시기에, 그 수혜를 받아 페미니즘을 접하고 또 여전히 가늘게나마 활동을 이어가는 한 활동가로서 소감을 보태볼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때를 기억해
“세상은 변하지 않고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페미니즘 리부트가 시작된 2015년 즈음을 떠올리며 그럴 리 없다고 단호히 이야기한다. 복학생이라는 신분으로 학교에 적응 해나갈 때쯤,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몇몇 이들이 ‘페미니즘’이라는 생소한 개념으로 학교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남는 게 시간뿐인 대학생이라 수업 듣고 술 마시며 시도 때도 없이 페미니즘 주제로 언쟁을 했고 도저히 합의 지점을 찾을 수 없는 때도 많았다. 세상이 불편하고 답답하다던 친구들을 이해하고 싶어 책을 읽고 공부하고 집회에 따라 나갔다.
우리나라는 치안이 안전한 편 아니냐며 자부했지만, 여전히 뉴스에는 각종 성폭력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왔고 자취하는 여자 친구들 방에는 남자 신발과 옷이 인테리어처럼 자리해 있었다. 이제는 평등하고 오히려 남성이 더 차별받는다는 이야기는 그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금융권 채용 성차별과 대학가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드러났다. 문학, 연극, 영화, 미술 등 각종 영역의 성폭력 사건이 해시태그 운동과 함께 고발됐고 여성들은 폭력에 가만있지 않겠다며 ‘ME TOO’ 운동을 이끌었다. 그건 단지 ‘갈등’으로 평가절하 될 수 없는 변화의 시작이었다. 페미니즘 운동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우리 모두 페미니즘 리부트의 수혜자이자 변화의 주역
너나 할 것 없이, 알게 모르게 모두가 이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을 받았다. 성적인 농담을 서슴지 않던 선배는 어느 날부터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학교 모임과 학생회에서 여성 후배들이 중책을 맡기 시작했다. 귀동냥으로 페미니즘을 배우기 시작한 나도 마찬가지였다. 막연하게 성평등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던 페미니즘은 가까운 주변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를 이해하는 언어가 됐다. 엄마와의 관계는 단지 ‘엄마’라는 역할을 넘어서 자신만의 꿈과 자긍심을 가진 사람으로 만날 수 있게 되면서 더 다채로워졌고 주변 여성들과도 단지 연애 대상만이 아닌 동료로 깊은 우정을 맺을 수 있게 됐다.
나아가 페미니즘은 나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기도 했다. 학창시절부터 나를 괴롭힌 몸에 대한 강박, 서열문화에 따른 긴장감, 남자다움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따르는 꾸며냈던 억지 감정들. 페미니즘은 그간 나를 괴롭힌 것들이 단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줬다.
물론 마냥 좋은 일만 있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친구들과 어색해지거나 하고 멀어졌다. 당면한 차별과 폭력을 알게 되며, 나는 조급해졌고고 했고 주변을 설득할 언어를 찾지 못한 채 느리게 변하는 세상과 갈등을 빚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 갈등을 피할 길이 마땅치 않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주변에 조금 더 많은 동료가 있었더라면, 또 그 갈등이 단지 문제가 아닌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조금 덜 힘들고 더 잘 이야기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다음 10년을 기약하기 위해,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래도 어찌저찌 1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수많은 동료를 만나고 떠나보냈다. 좋아하는 단체가 생겼다가 없어졌으며 변화를 만끽하기도, 휘몰아치는 백래시에 웅크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늘 최선이었다. 보내온 시간만큼 앞으로 더 나은 10년을 만들 수 있을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남성들의 변화가 절실한 과제다. 지난 시간동안 두드러진 문제 양상을 살펴보면 여성들의 성평등 인식 변화 속도가 남성들과 차이가 나타나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좀 천천히, 덜 성평등하게 가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간극을 줄이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고 시도하는 남성 페미니스트 모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내가 어떻게 감히 페미니스트라 말할 수 있겠냐’며 발언하기를 꺼렸고 또 다른 유해한 남성연대가 형성되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를 피해왔다. 그러나 언어는 혼자서 만들 수 없다.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고 실수하고 보완해야 비로소 남성에게도 페미니즘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설명하는 언어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유해한 남성성을 넘어서 대안이 될 수 있는 남성성의 모습은 무엇인지 제안하는 목소리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가부장제 아래서 빚어진 남성성이 만들어내는 부작용에 대해 다양한 곳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 해왔다. 그러나 당장 그것을 벗어던진 다음은 무엇인가? 마땅한 대안 제시가 없다면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어렵다. 최근 내가 몸담고 있는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은 ‘돌보는 남성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성들 사이에서 간과되고 외주 맡겼던 자기돌봄, 가사돌봄, 타인돌봄을 남성들이 스스로 해낼 때, 남성들과 세상은 비로소 더 행복해질 것이다.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가 유례없는 시기였다며 그리워하고 있을까? 이제는 ‘대중화’라는 말도 필요 없을 만큼 페미니즘이 당연한 시대를 살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앞으로 10년을 잘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지난 기억을 잘 정리하는 건 중요하다. 당신에게 페미니즘은 무슨 의미였는가? 어떻게 영향 미치고 있는가?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