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논단] 대학생 아닌 청춘도 응원받는 사회를

대학에 가는 삶 응원한다면 대학생 아닌 청춘도 응원받아야 청년이 일하다 죽게 두는 사회에선 누구의 삶도 안전하지 않다

2025-11-14     이라영 문화평론가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란희 감독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 ⓒ작업장 봄 제공

일주일 전에 지하철 안에서 기관사의 안내방송을 들었다. 가끔 친절하고 섬세한 기관사의 일상 안부 인사를 들을 때가 있어서 이번에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꽤 길게 이어지는 방송은 수능을 앞둔 수험생을 응원하는 목소리였다. 이맘때면 여기저기에서 연례행사처럼 수험생을 응원한다. 이럴 일인가 싶으면서도 대학 진학자가 다수이니 온 사회가 수능에 관심을 보이는 일이 자연스럽긴 하다. 대학 진학률이 75% 내외로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 거리에는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현수막이 노란 은행나무들 사이로 펄럭인다. 산업 현장 인력을 양성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특성화고에서조차 취업률보다 진학률이 높다. 견고한 학력/학벌주의 사회에서 대학에 가지 않으면 사회에서 투명해지기 쉽다. 그렇기에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라고들 말한다.

영화 ‘3학년 2학기’는 졸업을 앞두고 중소업체의 현장실습생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특성화고 3학년 학생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영화에는 시작부터 끝까지 두 종류의 긴장감이 흐른다. 첫째는 일터에서 혹여 발생할 사고에 대한 우려다.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공장에 함께 있는 것처럼 기계음을 계속 듣게 된다. 눈앞에는 날카롭고 무거우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기계들이 보인다.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안전 장비들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불꽃이 튀고, 높게 쌓인 박스들은 아슬아슬해 보인다. 지게차는 이 박스들을 반복적으로 나른다. 상자들이 쌓여있는 2층에는 난간이 없다. 난간이 없어야 지게차가 1층에서 2층으로 편리하게 짐을 나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위에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의 안전보다 일의 효율이 우선시된다. 그래서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작업 환경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이란희 감독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 ⓒ작업장 봄 제공

두 번째로 또 다른 긴장의 축은 일터 바깥에 있는 엄마와 학교 선생님이 주인공 창우와 맺고 있는 관계다. 직장 상사와 달리 엄마와 학교 선생님은 미성년자에게 최소한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위치다. 고충을 알릴 수 있고 실제로 창우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일터에서는 신체적 상해를 입을 위험 때문에 긴장된다면 가정과 학교에서 맺은 이 관계들은 혹여나 창우에게 마음에 상처를 줄까 봐 조마조마하다. 영화 속에는 온전히 나쁜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어른들도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버거운 노동자들이라 때로는 창우의 어려움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잔업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며 원하던 대학 진학까지 이루어 후배들에게 ‘레전드’로 불리던 선배는 끝내 너무도 젊은 나이에 영정 사진으로 후배들을 맞이한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열아홉 살의 실습생 창우와 다혜는 빈소에서 얼이 빠진 얼굴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다. 장례식장이 처음인 다혜는 “사람이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어.”라며 돌아오는 길에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열아홉 살의 사회생활이 동료의 빈소 방문과 함께 시작된 셈이다.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다가 자살한 청소년을 다루는 ‘다음, 소희’에서 ‘3학년 2학기’로 이어지는 이 영화들은 방식은 달라도 공통점이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청년들이 ‘현장’에서 어떤 ‘실습’을 하고 어떻게 불신을 경험하는지 보여주는 ‘노동 스릴러’이다.

이란희 감독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 ⓒ작업장 봄 제공

삶에 다양한 선택지가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에서 ‘선택’은 기만의 언어다. 어떤 선택은 미래를 응원받는 삶이 아니라 사고로 과거가 되어버린 삶으로 뉴스에 나온다. 올해 수능 시험일은 11월 13일로 공교롭게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날이다. 대학에 가는 삶을 응원한다면 대학에 가지 않는/못하는 삶도 응원받아야 한다. 사회 초년생이 ‘일하다 죽을 수 있다’는 걸 배우도록 방치하는 사회에서 누구의 삶도 안전하지 않다.

이라영 문화평론가 ⓒ본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