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논단] ‘K-페미니즘’의 불가능성
2025 APEC 경주 정상회의가 진행되는 기간 내내 각종 언론은 K-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 부었다. ‘케이팝데몬헌터스’의 노래가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주되고, 엔비디아 CEO 잭슨 황이 깐부치킨을 먹었다. 미국의 어이없는 관세정책에도 K-반도체가 있다면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유튜버들의 논평이 줄을 이었고, 트럼프가 경주의 신라 금관을 선물 받고 정신을 못 차렸다는 식의 자찬이 그 뒤를 이었다. 그렇다면 국뽕과 전혀 관계없던 사람마저 취하게 만든 ‘K-문화’라는 것이 무엇인가?
‘K-문화’는 ‘한국문화’와 달리 ‘창조적 융합’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문화’라고 할 때 우리는 일본의 가부키나 중국의 경극과는 완전히 다른 판소리 같은 것을 떠올리면서 이것이 한국 고유의 순수한 것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K-문화’는 혼종의 그 무엇이다. 아이돌 그룹은 갓을 쓰고 나오지만 서양의 리듬에 맞춰 소다 팝을 부른다. 순수성을 고집하기보다 다양한 문화를 창조적으로 융합해내었기에 K-문화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K-문화의 다른 특징을 들자면 ‘냉혈한 능력주의 경쟁’일 것이다. 경연을 중심으로 하는 K-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일단 참가자들의 요리, 노래, 춤 실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기서의 경쟁이 피도 눈물도 없다는 데 있다. ‘오징어게임’에는 생존을 위해 자식도 죽이는 어머니가 등장하며, ‘흑백 요리사’에서 심사위원은 자신의 스승이나 제자도 탈락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게임의 규칙이다. 이는 학벌, 학연, 지연 등으로 부패한 기성세대에 염증을 느끼는 청년세대들의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에는 인간이 처해있는 구체적 맥락에 대한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질문해 보자. 모든 것이 K로 넘쳐나는 이 시기에 왜 K-인문학이나 K-페미니즘은 부흥하지 않았는가? 인문학이나 페미니즘은 탁월한 창조적 융합을 해내지 못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가령 정보라의 『저주토끼』는 한국의 냉혹한 현실과 SF의 기괴한 환상을 겹쳐내는 방식으로,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한국의 가부장적 가족관계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채식주의와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움을 창조해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디지털 시대와 성폭력을 융합적으로 사고하는 가운데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짚어냈다. 이때 해외 언론들은 분명히 ‘K-문학’이나 ‘K-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국내의 몇몇 페미니스트들도 이에 호응하여 4비 운동(비혼·비출산·비연애·비섹스)과 같은 ‘K-페미니즘’을 해외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K-인문학이나 K-페미니즘은 소위 주류 대열에 올라갈 수 없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인문학이나 페미니즘은 대중적 반응을 넘어 전문가적 담론을 필요로 하는데 대학은 이들의 과감하고 새로운 융합의 언어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2007년부터 인문한국사업 등 거대한 인문융복합 연구프로젝트의 흐름이 시작되었지만 이 흐름은 결과적으로 학과 중심의 대학체계 안에서 밀려났다. 내학 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백래시의 확산과 더불어 페미니즘은 낙인어가 되기도 하였다. 2015년에서 2020년까지 페미니즘은 그 어떤 단어보다 언론에 많이 오르내렸고 가장 많이 팔리는 종류의 서적이 되었지만 대학 내에서 젠더융복합 관련 분야는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결정적으로 인문학과 페미니즘은 애초부터 K-문화 기저에 놓인 ‘냉혈한 능력주의 경쟁’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기계적 평등(fairness)이 아니라 소수자를 포용하는 정의(justice)를 이야기하는 비판적 인문학과 페미니즘은 개인들 간의 경쟁보다는 사회적 변화를, 기계적 평등보다는 구체적으로 다른 상황에 처한 인간 특히 소수자의 위치를 고려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와 관련해서 볼 때 K-페미니즘은 성립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성립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언젠가 ‘K-페미니즘’이라는 호명방식에 강하게 항의했던 선배 교수의 의중을 이제야 다시 떠올려본다. 그는 한국의 페미니즘뿐 아니라 K-문화가 냉혈한 능력주의 경쟁과 친숙해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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