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이자 시작점인, 피해자들에게 법원 [이은의 변호사의 시선]

[이은의 변호사의 시선]

2025-10-02     이은의 변호사
2018년 7월 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3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불편한 용기’가 열려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피해자의 성별에 따른 차별 없는 동등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여성신문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자로 사는 것은 험난하다. 디지털 성범죄와 달리 직접적인 증거가 존재하기 어려운 일반적인 성폭력 사건들의 기소율은 여전히 낮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신고한 후 수사 과정을 감당할 수 있을지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 막막하다. 특히 학교든 회사든 모임이든 가해자와 같은 곳에 적이라도 두고 있을 땐 더 그러하다. 가해자에게 제대로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불안하고, 이후 어떤 방식으로 생길지 모를 불이익도 걱정된다. 자칫 성폭력이 성폭력 아닌 것처럼 왜곡될까봐 끔찍하다. 국가가 아무리 피해자들에게 신고를 외친다 한들 피해자들에게 성폭력 신고로 더 나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존재하는 한 될 일이 아니다.

지난 몇 년 간 사법기관이 성폭력에 대한 인식 수준이나 양형은 진일보했다. 거기에는 피해자가 입은 피해의 정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었다. 그래서 비록 범죄행위가 성폭행에 이르지는 않았더라도 추행의 정도가 심하거나 혹은 피해자가 범죄피해에 취약한 상태에서 반복된 강제추행 사건에서, 특히 피해자의 용서를 받지 못한 가해자들에 대한 실형 선고가 늘었다. 또 가해자가 유명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 것은 선처의 이유가 아니라 엄벌의 이유가 되었다. 법원이 성범죄가 개인에 대한 침익적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질서에 반하는 범죄라는  인식을 따라가기 시작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디지털성범죄에서는 여전히 대중과 법원의 인식 사이에 괴리가 훨씬 크다.

N번방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해지자 잠시, 법원은 대규모 유포를 낀 성범죄에 대해 경악하고 엄벌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그리 오래가지도 확장되지도 않았다. 법원은 피해자가 미성년자거나 성폭행이나 협박, 유포 등 다른 중범죄와 함께 결합되지 않은 불법촬영 사건들에서 여전히 가해자들에게 온정적이다. 국민적 응원을 받았던 국가대표 축구선수 황의조의 불법촬영 사건은 그런 대표적 사례다.  

황의조 사건이 처음 이슈가 된 것은 촬영물 유포 때문이었지만, 많은 이들을 경악하게 만든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불법촬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피해자에게나 대중들에게 미친 충격이 컸지만, 법원의 처벌은 미진했다. 1심 법원과 2심 법원이 황의조에 대해 판단한 내용은 현저히 달랐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결과는 다르지가 않았다. 1심 법원은 황의조가 불법촬영을 했지만 유포의 피해자이고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일으킨 책임이 없다면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반면에 2심은 황의조가 피해자에게 심각한 2차 피해를 일으켰다고 판단했고 불법촬영이어도 유포당했으니 피해자라는 걸 감형 사유로 삼지 않았다. 이렇게 2심 법원은 1심의 판단 이유가 죄다 잘못됐다고 했지만, 정작 끝에 가서는 1심의 양형이 재량 범위 내에 있다며 똑같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내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법전을, 또 다른 한 손에 공정성을 의미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여성신문

불법촬영은 그 자체로 피해자에게 심각한 피해를 남기지만, 피해자를 여타 다른 중범죄 위험에 노출시키는 특성이 있다. 법원이 성폭행이나 강제추행보다 더 관대한 판단을 하는 현상은 디지털 환경에 대한 몰이해 때문도 있겠지만,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후진적 인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연인관계든 일회성 만남이든 성관계를 용인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법촬영 사건에서 이러한 생각은 좀더 짙게 작동한다. 불법촬영 사건에서 많은 변호사들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의하에 성관계를 했다고, 피해자가 의심할만한 정황이 있었으나 당시 헤어지지 않고 사귀었다고, 변론한다. 이는 실상 피해자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말이자, 불법촬영 범죄가 ‘놀다 보니 생긴 실수’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무지’라는 왜곡을 추구한다. 이런 왜곡은 불법촬영 범죄에 대하여 ‘같이 놀다가 실수해서 혼자 책임지게 된 무지하지만 딱한 피고인이란 왜곡을 낳는다. 불법촬영은 음주운전과 마찬가지로 중범죄이고 반복성이 높은 습관이지만,이런 왜곡은 이제서야 처음 걸린 불법촬영에 대한 엄벌은 가혹하고 부담스러워 진다.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변론이 여전히 통용되는 것은 그것이 여전히 법원에서 일정 부분 통한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하지만 불법촬영 범죄에 대해 우리 사회에 던져진 숙제가 법원의 부족한 양형만으로 얘기될 일이 아니다. 아직 미진한 지금은 그간 용기 내서 신고하고 끝까지 싸운 피해자들이 눈물과 땀으로 얻어낸 결과물이다. 황의조의 불법촬영 사건에서도 비록 법원이 징역형을 선고하며 집행을 유예하기는 했더라도, 범죄의 심각성과 죄질에 대하여 판결문 위에 기록했다. 덕분에 누군가는 황의조가 국내 복귀할 수 없게 하라고 진정을 넣기도 했고, 부랴부랴 축협이 황의조가 사실상 영구제명 샹태라는 입장이나마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법원의 판결이 어떤 끝이나 전부가 아니라 사회가 지향하고 추구해 나가야 할 가치실현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안과 고통을 지고 있을 피해자들에게 법원도, 사회도, 기억해야 할 가치다.  

이은의 변호사. ⓒ북스코프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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