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마고의 나라, 그 모습을 드러내다

2025-09-26     김정희(가배울 이사)

1. 들어가는 글

이 글은 이제 막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마고나라에 대한 것이다. 마고국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우실하 교수의 동이족 홍산문화 모계국가 연구와 신화, 다른 기록 등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물론 이 논의에는 직관적이고 가설적인 부분도 있다. 그러나 마고국의 실체를 논의의 장으로 끌어낼 만큼의 증거는 어느 정도 충분하다고 보고 용기를 내어 논의를 시도한다. 앞으로 고고학과 문헌 연구를 통해 마고나라의 실체가 그 전모를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마중물의 성격으로 기획해 보는 글이다.

2. 마고국의 증거

마고국의 첫 번째 증거는 홍산 문화(BC 4500~3000년)가 곰을 토템으로 했던 모계 국가의 문화라는 우실하 교수의 연구다([역사특강 2강 2부]우실하, 제5의 문명 https://youtu.be/2DrB-db8ES0?si=LS91kfa89ajMXdSg) 이 연구를 요약하여 소개한다.

중국이 중국 역사를 역사 왜곡을 서슴치 않을 정도로 자민족 중심적으로 정리해가는 거대한 동북 공정 프로젝트 이전에 시작한 게 중화문명의 원류인 하.상.주의 시기를 정하는 단대 공정이었다. 이들이 이 공정을 하며 발견한 것이 동이족의 문화인 홍산문화였다. 지금 대략 나오는 결론은 중화문명은 홍산문화의 근거지인 요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지는 모든 문화가 중화문명의 소수족 문화로 흡수되는 것이다.

우실하 교수는 홍산문화 후기는 국가 성립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어 초기 국가 단계로 본다. 적봉시에만 500여곳 유적지가 있고 여신묘가 발견되면서 홍산 문화의 주도 세력들이 곰을 토템으로 한민족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홍산문화 유물이 발견된 우하량 유적에는 곰의 턱뼈와 곰발 소조상이 있다. 곰 제의대는 지구의 북방구 전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는 특히 동북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곰을 신 또는 조상으로 숭배하는 풍습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홍산문화는 옥기 문화이다. 옥으로 만든 제단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원형 제단 꼭대기에 가서 천제를 지냈을 것이라고 본다. 옥은 강도가 굉장히 강하다. 해옥사라고 기원전 3천 년에 옥을 자를 때 쓰는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1.5cm 구멍을 뚫는데 순수한 작업 시간만 31시간이 걸린다. 묘장의 규모와 옥기들은 신분 집단, 전문 장인 집단이 분화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여신이라는 단일 신을 중심으로 통합되는 씨족이나 부족 단계를 넘어선 단계를 보여준다. 우실하 교수는 단군 신화를 기원전 2333년에 고정하면 안 되고 단군신화에 나오는 이미 살고 있던 호족과 웅족까지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홍산 문화는 웅족 여신을 모시니 고조선 성립 이전의 모계 웅족의 초기 국가의 문화라는 말이 된다. 여기까지가 우실하 교수의 연구에 대한 요약이다.

그런데 곰 토템 신앙을 가졌다고 홍산문화의 주역이 우리 선조라고 말할 수 있나? 이에 대해 네이처지에 발표된 논문이 답을 준다. 이 논문에 대한 해석 역시 우실하 교수의 글을 요약한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지 2021년 11월호에 알타이어족으로도 불리는 트랜스 유라시아어족(transeurasian languages) 언어 기원지가 9천 년 전 서요하유역의 기장 농업 지역이라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어 주목받았다.

우실하 교수는 이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연구 결과는 농경의 확산을 통해서 트란스 유라시아 어족(= 알타이어족) 언어의 확산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기원이 같은 3천여 개의 언어의 계통수를 언어학, 고고학, 유전, 생물학 분야의 최신 정보를 종합하여 그린 결과, 유라시아어족 언어의 기원지는 9천년 전 서요하 유역의 기장 농업 지역임을 과학적으로 밝혔다. 논문의 핵심은 트란스 유라시아어족 언어가 서유하 지역에 기원해서 5500년 전에 원시 한국어, 일본어로, 5천 년 전에는 원시 몽골어, 퉁구스어로 1차로 분화되었고, 청동기 시대에는 원시 한국어, 원시 일본어, 원시 몽골어, 원시 퉁구스어, 원시 튀르크어, 돌궐어로 2차로 분화되었으며, 이후에 각 지역으로 다양하게 확대되어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요하 문명 지역은 트란스 유라시아어족의 기원지일 뿐만이 아니라 (1) 9천 년 전 최초의 빗살무늬 토기 (2) 8천 년 전 최초의 재배종 기장과 조 (3) 8천 년 전 최초의 옥결(옥 귀걸이) (4) 8천 년 전 최초의 적성묘 (5) 7천 년 전 최초의 복골(卜骨: 점을 친 뼈) (6) 7천 년 전 최초의 흑도(黑陶) (7) 5500년 전 최초의 계단식 적석총과 (8) 4300년 전 최초의 ‘치(稚)를 가 갖춘 석성’, (9) 3천 년 전 최초의 비파형 동검 등의 기원지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1, 4, 6, 7, 8, 9는 요하 문명과 한반도에서 모두 발견되는데, 황화 문명 중심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실하 교수는 요하 문명이 동북아시아의 공통의 시원 문명이라고 말한다. 이 지역이 바로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이기도 하다. 요하문명을 일군 사람들이 동이족의 선조들이었고, 예맥족의 선조들이었고 우리의 선조들이었다(‘요하문명 지역은 언어적으로도 황하 문명 지역과는 별개인 독자적 문명’,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65794, 2021.)

<사진1> 홍산문화 옥공예품, https://namu.wiki/w/%ED%99%8D%EC%82%B0%20%EB%AC%B8%ED%99%94

홍산문화 옥공예품 ⓒ위키피디아

<사진2> 홍산문화 여신, https://namu.wiki/w/%ED%99%8D%EC%82%B0%20%EB%AC%B8%ED%99%94

홍산문화 여신 ⓒ위키피디아

홍산문화의 초기 국가의 모습을 조금 더 실감있게 상상해 볼 수 있는 예로 이로쿼이족(Iroquois)의 예를 들 수 있다. 이로쿼이족은 6개 부족 연맹체로 이루어진 초기 국가 단계였다. 장옥(long house)에 살았고 씨족여장(clan matron)이라는 가모장이 이 집의 가장이었다. 전쟁에 나가기 위해서 군대는 이 씨족 여장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메트롱은 추장이 허리에 두르는 왐펌(wampum)이라는 허리띠를 보관했다. 추장은 이 완펌을 메트롱에게 받아 둘러야만 전쟁에 나갈 수 있었다.

“이들 부족들은 모두 모계 사회로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여성이 결혼할 경우 결혼 전에 소유한 자신의 재산은 따로 관리하였으며 자식들은 어머니 쪽 부족을 따랐고 이혼할 때 자식의 양육권도 여성에게 있었으며 모두 지도자로 부족의 어머니(clan mother)라는 가장 나이 많은 여성을 두었다. 부족장은 세습직이었는데 부족의 어머니가 부족장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부족장을 교체할 수도 있었으며 이렇게 교체되는 건 불명예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https://naver.me/I5FXwODk) 우리가 추장으로 알고 있는 부족장은 남성이다. 그런데 그 부족장 남성을 통제하는 것이 씨족장 메트롱이었다.

마고국의 두번째 증거는 『환단고기』의 기록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와라 환웅 13세 초기에 웅족 여왕의 후예를 여라하였는데 처음으로 봉함을 받아 왕검이 되었다. 왕검이 덕을 베풀고 백성을 사랑함으로 영토가 점점 넓어졌다. 여러 지역 왕검이 와서 방물을 바쳤고 귀화하는 자가 천여 명이었다. 그 뒤 460년이지나 신인왕검이 출현하여 백성에게 신망을 크게 얻어 비왕(부왕)에 올라 24년 섭정하였다. 웅씨 왕이 전쟁에서 죽자 왕건이 드디어 그 자리를 계승하여 구환을 통일하였다.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431).”

위에서 보면 배달국의 13번째 왕 사와라 환웅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불명확한 웅족 여왕의 후예를 아마도 제후쯤으로 짐작되는 왕검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이 왕검이란 직책은 460년 이어졌고 이때 신인 왕검인 단군이 나와 처음에는 왕 밑의 비왕으로 24년 다스리다 웅녀국 여왕이 죽자 구환 부족을 통일해 고조선을 세웠다. 또 다른 기록을 보자.

“단군왕검의 혈통과 조선의 건국 고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요 어머니는 웅씨 왕의 따님이시다. 신묘 (환기 4828 신시개천 1528 bce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 우거진 숲에서 태어나시니 신인의 덕이 있어 원근 사람들이 모두 경외하여 따랐다. 14세 되던 갑진년에 웅씨 왕이 그 신성함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천거하여 ‘대읍국’의 국사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무진년 당요 때에 당국에 돌아와 아사달의 박달나무 우거진 터에 이르시니 온 나라 백성이 천재의 아들로 추대하였다. 구한족을 합쳐서 하나로 통일하시고 신성한 덕화가 멀리까지 미치니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성조께서 비왕으로 24년 제왕으로 93년 재위하셨고 그 수는 130세였다. 단군왕검의 재위 원년은 무진 환기 4865 신시 개천 1565 단기원전 BC 2333년이다. 신씨 시대 처음 시작할 무렵에 사방에서 백성이 모여들어 산골짜기 곳곳에 퍼져 살았는데 풀로 옷을 지어 있고 맨발로 다녔다.

배달 신시 개천 년에 10월 3일에 신인 왕검께서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00명을 거느리고 와서 단목토에 와서 백성과 더불어 삼신상제님께 천재를 지내셨다. 왕검께서 신성한 덕성과 성스러움을 겸한 인자함으로 능히 선대 환인ㆍ환웅 선조의 가르침을 받고 하늘의 뜻을 계승하시니 그 공덕이 높고 커서 찬란하게 빛났다(『환단고기』 「단군세기」‘1.단군왕검의 탄강과 제천’:93).”

이 기록에서는 웅씨 여왕의 외손주였던 단군이 비범하다는 평이 자자해지자 웅씨 여왕이 비왕에 봉한다. 세월이 흘러 백성들이 단군을 왕으로 봉한다. 이 두 기록은 곰이 시련을 이기고 변해서 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고조선 신화관 보다는 좀 더 역사적이다. 웅녀국은 이주민이 배달국을 세우기 이전부터 있었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청동기와는 별개의 옥기 문명 단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원주민이 고도의 문명국가였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환국은 역대 7분의 환인들이 BC 7197년부터 BC 3897년까지 3301년간 다스렸고 배달국은 18명의 환웅들이 BC3897년부터 BC2333 년까지 1565년간 다스렸다. 홍산문화는 BC 4500년에서 BC3000년 사이의 문화이고 그 말기는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초기국가 성립단계였다고 보기 때문에 결국은 배달국은 홍산문화 웅녀국과 그 시기가 겹친다.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은 웅녀국의 존재를 입증한다. 이주민 배달국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적과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혹은 고고학자들의 관심 밖이어서 땅속이나 몽고 초원 변방에 널브러져 있을 수도 있다. 배달국의 환웅을 위시한 무리가 무력이 우세한 소수 이주민이었다면 더더욱 그 유적, 유물을 찾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환국과 배달국은 실제하지 않은 가상의 날조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고대 우리 선조들이 세운 최초의 나라 이름이 환국(桓國)으로 나와 있다. 중국에서는 치우와 동시대 인물인 황제 헌원이 역사적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고대국은 완전한 날조나 신화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어떤 집단으로 존재는 했을 텐데, 그것이 웅씨 여왕의 집단과 연맹체를 이룬 부족 연맹체의 지배적인 부족이었는지, 웅씨 여왕의 나라와 별개의 국가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웅씨 여왕의 나라는 홍산문화 유적자와 유물들이 존재하지만 아직 환국, 배달국으로 보아는 유적지와 유물들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환국, 배달국이 웅녀족과 부족 연맹체를 이룬 무력이 강한 부족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기원전 11000년전 유적인 괴테클리 테페와 같은 후기 구석기, 채집수렵 시대의 초 고대문명도 고대 국가의 존재에 힘을 실어준다. 20여 개에 달하는 원 모양으로 세워진 총 200개 이상의 T자 형태 돌기둥 유적이 특징이며, 그중 가장 높은 것은 5.5m에 달한다. 이제 겨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려던 후기 구석기 말, 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되는 시기이다. 돌기둥들은 인근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에서 바위를 떼어내 운반했는데 기둥 하나, 하나의 무게가 10~20톤에 달했기 때문에 운반과 조각, 건설에는 적어도 체계적으로 집단화된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괴베클리 테페에서 문자나 바퀴, 토기, 청동기에 사용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그리고 농업이나 가축 사용을 짐작하게 할 만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은 점에서 기존 신석기 혁명과 농업 발전을 통한 인류의 집단 사회 구조 형성의 흐름으로 이해되는 기존 학술의 충돌되는 점이다(괴베클리테페, ttps://naver.me/FGpII9Vi).

<사진3> 괴베클리테페, https://naver.me/FGpII9Vi

괴베클리테페 ⓒ나무위키

이같은 채집•수렵을 기반으로 하는 기원전 11000년 전의 괴베클리 테페와 같은 초고대문명의 존재를 감안하면 기원전 4500년에서 3000년경의 유적지와 유물로 입증된 웅녀국은 물론이고 또 다른 고대 국가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것이 배달국일 가능성은 존재한다.

배달국 또는 배달 부족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에게 월드컵 축구 시합 응원에서 붉은 악마로 되살아난 치우천황이 『환단고기』에서 배달국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고 동이국 왕으로 기록되고 있는 중국 사서가 있기 때문이다. 《노사》(路史) <국명기>(國名紀)에 의하면 치우의 구려(黎)는 동이국(東夷國)이었다고 한다. 즉 치우는 동이 구려로서 첫 번째 천자를 칭한 임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이국이 배달국 혹은 웅녀국일 가능성이 있다.

“여(黎)는 하나라 제후인 구려(九黎)이다. 두예는 말하기를, ‘동이(東夷) 국가다’라고 했다”(《노사》 <국명기>(國名紀) -려(黎)(namu.wiki›치우)

조상신으로 치우를 숭배하는 묘족은 고구려 후손이라고도 하고 동이족이다. ‘숨어 있는 보석’이라는 귀주성(貴州省)에는 치우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는 묘족(苗族)이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산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묘족이라고 한다. 치우는 서기전 28세기로 상정되는 때 탁록대전을 벌인 동이족의 우두머리로 알려져 있다. “탁록은 지금의 북경 북쪽에 있으니, 중국 남방에 있는 귀주성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치우가 황제에게 패배한 후, 치우의 한 갈래인 묘족은 중국 중원에서 큰 강을 세 개나 건너 귀주성까지 이주해왔다고 믿고 있다. 지금도 묘족 여인들의 치마에는 그들이 건너온 세 개의 큰 강을 나타내는 무늬가 있다고 한다. 결국 묘족은 치우가 상징하듯이 그 근원은 동이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동이족 치우의 후예, 묘족의 역동성’, https://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40; 중국 묘족 고구려 후예, https://youtube.com/shorts/SFtca_cF5dw?si=QrZ9tHxQhdhBRbUV) 고고학 유적지의 발견으로 황제는 신화적 인물에서 역사적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중국역사 1만년으로 끌어올려라” 신화·전설을 역사로 만드는 ‘공정’,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51176?sid=104) 따라서 치우 역시 역사적 인물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마고의 나라 웅녀국과 배달국 또는 배달 부족은 동시대에 존재하고 상호 혼인동맹을 맺은 관계였다고 보인다.

마고국에 대한 세 번째 증거로 고려 말 백성들이 부른 노래에 나오는 ‘마고의 나라’(麻古之那)라는 표현이다.

“왕이 역의 수레로 빨리 달리니 고생과 어려움이 매우 심하였는데, 게양(揭陽)에 이르지 못하고 병자에 악양현(岳陽縣)에서 훙거하였다. 혹자는 독약을 먹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귤을 먹고 사망하였다고도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듣고도 슬퍼하는 자는 없었다. 소민(小民)들은 심지어 기뻐서 뛰기까지 하며 다시 살 수 있는 날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 민들이 덕을 입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다. 처음에 궁중과 거리에서 노래하여 말하기를,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 지금 가면 언제 오나”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충혜왕1344년(후5년), ‘왕이 악양헌에서 사망하다’), 여기서 충혜왕이 귀양길에 죽자 백성들은 ‘아야, 단군의 나라’가 아니라 “아야 마고의 나라, 지금 가면 언제 오나”라고 노래를 부른다. 고려 말까지도 백성들에게는 ‘단군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보다는 ‘마고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살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3. 마고의 나라 지우기

『삼국유사』에 첫 나라로 환국이 기록되고 있지만, 우리가 개천절을 단군이 고조선을 연 날로, 국경일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첫 나라와 그 첫 왕은 고조선, 단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환단고기』가 대중적으로 읽히며 그 시원이 환국•환인, 배달국•환웅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우리 민족의 첫 국가, 첫 왕에 대한 민족 기억의 계보에는 마고국•마고와 고조선•단군의 두 계보가 각축해 왔고 『환단고기』는 마고국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입장에서의 기록으로 보인다. 그러나 배달국과 마고국이 혼인동맹 관계에 있었고 마고국의 영향력이 워낙 세니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고 단군의 외가인 웅씨 여왕이 다스린 나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각축 관계를 엿보게 해주는 평양시 강동군 구빈마을에 내려오는 왕림고개 전설을 보자. 이 전설에서는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인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싸움에서 진 마고할미는 도망친 후 박달족과 단군의 동태를 살폈고 단군이 자신의 부족에게 너무도 잘해 주는 것을 보게 된다. 마고는 단군에게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단군은 투항한 마고할미와 그 아래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극진히 대접했다. 아홉 손님을 맞이한 곳이 구빈(九賓)마을이고, 마고가 항복하기 위해 마고성으로 돌아오면서 넘은 고개를 왕림(枉臨)고개라고 한다(조현설, 2013).

이 전설이 역사의 진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면 앞에 소개한 웅씨 여왕 서거 후 백성의 추대로 인한 고조선 건국으로의 평화로운 이양이라는 (『환단고기』 ‘단군세기1.단군왕검의 탄강과 제천’:93)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최고 통치자가 여왕으로 이어지고 제후쯤으로 여겨지던 지방 우두머리가 남성인 정치체제가 여왕제가 없어지고 남성 왕으로 넘어가는 대격변이 그리 평화롭게 될 수 있었을까? 진실은 『환단고기』 기록보다는 전설에 가깝다고 보인다.

동이족의 첫 나라를 환국이나 고조선이 아니라 마고의 계보에서 찾으려는 흐름은 『부도지』에 기록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마고-궁희-황궁씨-유인씨-한인씨-한웅씨-임검씨(단군)에 이르는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한인씨는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환국의 7분의 환인들로, 한웅씨를 배달국 18명의 환웅들로 이해하면 『부도지』와 『환단고기』의 계보는 어느 정도 일치한다. 『환단고기』에 나오지 않는 황궁, 유인씨는 마고족과 박달족 선조들이 혼인동맹을 맺기 전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환단고기』에는 배달국 시대부터 웅족과 환족이 혼인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는 사람인 호족과 웅족이 참 사람이 되기 위해 마늘과 쑥을 먹으며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기도하라는 환웅의 지시에 따라 그대로 따른 웅족은 참사람이 된다. 이후 웅족 여인이 시집갈 곳이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에 와서 주문을 외우며 아이 갖기를 기도하자 이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임시로 환족으로 받아들여 환족 남자들과 혼인하게 하고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면 환의 핏줄을 이은 자손으로 입적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편 44~45). 이 기록은 배달국을 우위 문화로 보는 입장에서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마고국 또는 박달족과 마고족의 혼인 동맹은 꽤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배달국은 천왕을 중심으로 계보를 정리하고 있고 마고국은 마고의 계보로 기록을 하고 있다. 아니면 배달국이 마고국인데, 후대의 기록에서 군사조직의 우두머리를 내고 마고국 왕실 왕비나 공주의 남편을 배출한 박달족이 단군이 여왕제를 폐지하고 왕으로 등극하면서 박달족 위주로 역사를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두 부족은 군사 조직을 공유하는 마고국 부족 연맹체의 일원이었을까? 이 경우, 군사조직의 우두머리 직책이 환웅, 왕검이었던 거 같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의 아버지가 단웅이라고 나온다. 배달국 18세, 마지막 왕인 거불단 환웅이 곧 단웅이다(『환단고기』 「삼성기전 하편」:55). 마고국의 증거는 홍산문화의 유적, 유물들로 차고 넘친다. 그러나 배달국, 동이국은 기록만 있을 뿐, 유적지,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중국 고고학계가 발굴하지 않고 았다. 홍산문화가 끝나고 고조선이 열린다. 고조선 첫 왕 단군은 웅녀국 마지막 왕실의 외손주였다. 이러한 것들이 이러한 심증을 갖게 한다. 필자는 웅씨 여왕이 최고 통치자였던 이 나라가 『고려사절요』에서 백성들이 ‘마고의 나라’로 칭한 그 정체성의 시원이라고 본다. 홍산문화는 이 마고국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을 따른다면 ‘천부경’, ‘삼일신고’, ‘홍익인간’의 이념은 마고국에서 형성된 것이고 이것이 고조선으로 전승되었을 것이다. 모계는 모거제이고 따라서 자식은 어머니 집에서 자라고 교육받는다. 단군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단군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웅씨 여왕 나라의 제후 정도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몸소 여왕 대신 왕좌에 올라 어머니 나라를 아버지 나라로 체제 변혁을 꾀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려시대 족보는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 외손, 외손의 외손까지 기록하였고 딸과 사위가 함께 사는 모거제였다. 그래서 혼례는 신부집 마당에서 이루어졌고 조선에서도 이어졌다. 조선시대 왕실에서조차 궁실에서 혼례를 올린 왕은 4명에 불과했다. 이 풍습은 60년대까지 경상도 지역에서는 딸과 사위가 10년 이상 처가살이하다 분가하는 풍습으로 이어져왔다. ‘마고의 나라’의 뿌리깊은 유제일 것이다.

4. 나가는 말: 마고 나라의 재림

얼마 전에 아들 며느리와 30개월 된 손녀가 와서 자고 갔다. 이제 막 단어를 나열하는 말을 하기 시작한 손녀는 “언니, 언니”, “오빠, 오빠” 하며 데몬 헌터스의 노래들을 틀어 달라고 했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38세인 딸을 키울 때는 읽어 줄 동화가 없어서 신화를 뒤적여 설문대 할망이 똥과 오줌으로 제주도를 만든 이야기, 학생들이 수업 기말 리포트로 써낸, 신데렐라가 왕자와 칼싸움하면서 이겨 먹고 친구로 잘 지냈다는 개작한 신데렐라 동화 이야기를 들려주며 키웠다. 이제는 완벽한 마고 여신의 이야기가 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여기에 열광한다. 이 아이의 무의식에는 피학적인 성별 사회화가 침투할 여지가 눈꼽만치도 없다. 칼싸움 잘하는 신데렐라와 창조 여신 설문대할망, 여성 전사 뮬란의 이야기로 무의식이 형성된 딸은 사랑이 고통이고 자기의 목소리조차 잃어야 하는 인어공주 이야기를 거부하고 왕자를 찌르고 부모와 언니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자기 서사를 만들었다. 이렇듯 아이들은 더 이상 피학적 이야기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이 재림한 마고 이야기에 온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우리는 정작 왜 이렇게 세계인들이 이 서사에 열광하는지 어리둥절하고 있을 뿐이다. 전 세계인에게 말해 줄 마고의 서사가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 스스로 무지하다. 데몬 헌터스 마고의 재림 이야기도 한반도 밖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홍익인간의 단군서사를 넘어서 필경 이 정신의 젖줄이었을 마고 여신의 서사이다. 이미 마고 나라를 말해주는 유물 유적도 나왔다. 학계가 이를 보지 않을 뿐이다. 30개월 된 손녀가 학교에 가서 국사를 배울 때 마고 이야기가 빠진 국사가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을까? 이 학계의 지독한 문화 지체증은 언제 깨질 수 있을까? 이제라도 관심을 갖고 마고 나라 연구를 위해 분발해 주면 좋겠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여전히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괜찮다. 이미 순수한 영혼들이 마고 여신 문화의 현대적 재림을 가져오고 있다. 이 영혼들은 홀로그램 마고 이야기와 같은 더 세련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종교라기보다는 문화다. 겁낼 필요가 없다. 모든 종교와 어릴 수 있는 평화의 살림 문화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1. 원전

『고려사절요』, 충혜왕1344년(후5년), ‘왕이 악양헌에서 사망하다’,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j_025r_0030_0050_0010_0030&kingName=%EC%B6%A9%ED%98%9C%EC%99%95(%E5%BF%A0%E6%83%A0%E7%8E%8B)&occuredYear=1344&occuredMon=01&ictType=&types=r.

박제상 지음, 김은수 번역, 주해(1986), 『부도지』, 한문화.

『환단고기』, 2012, 상생출판.

2. 문헌, 유튜브, 인터넷 사전

우실하(2013), ‘[역사특강 2강 2부]우실하, 제5의 문명’, https://youtu.be/2DrB-db8ES0?si=LS91kfa89ajMXdSg)

나무위키(2025), namu.wiki›치우

나무위키(2025), ‘괴베클리테페’, https://naver.me/FGpII9Vi

인생모토365(2025), ‘중국 묘족 고구려 후예’, https://youtube.com/shorts/SFtca_cF5dw?si=QrZ9tHxQhdhBRbUV

조현설, 2013,『마고 할미 신화연구』, 민속원.

3. 신문기사

“중국역사 1만년으로 끌어올려라” 신화·전설을 역사로 만드는 ‘공정’,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51176?sid=104, 2004

‘요하문명 지역은 언어적으로도 황하 문명 지역과는 별개인 독자적 문명’,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65794, 2021.

김정희 가배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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