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여성들] 숨 쉬듯 이어가는 달리기
[달리는 여성들] Chapter 6. 윤희(아이린)이야기
“다시는 뛰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달리기와 다시 만났다. 지금은 달리기를 통해 가장 자유롭고 자신다운 순간을 살고 있는 김윤희, 그리고 러너들이 부르는 또 다른 이름 ‘코치 아이린’.
달릴 수 있는 용기를 전하며 여전히 생생하게 빛난다.
“달리기는 늘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죠. 선수, 러너, 코치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러닝은 제 인생의 챕터마다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있어요.”
윤희의 달리기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됐다. 반 친구들의 응원 속에서 뛰던 육상부의 어린 소녀는 중·고교 육상 부를 거쳐 실업팀에 입단했다. 주종목 은 5,000m와 10,000m. 빠르게 치고 나가기보다 묵묵히 오래 버티는 것이 무기였다. 그러나 자율적 훈련 환경, 기량 차이가 큰 선배들 사이에서 성적 압박과 낮아지는 자존감에 흔들렸다. 결국 실업팀 선수 4년 차, 은퇴를 결심했다.
“신호등이 깜빡여도, 다시는 달리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하며.
하지만 달리기는 뜻밖의 순간에 다시 찾아왔다. 직장 생활의 긴장과 압박에 지쳐 집을 나선 어느 밤, 선수 시절에도 달려본 적 없는 첫 한강 러닝을 했다. 기록도, 누군가의 시선도 없었다. 강바람을 가르며 자유롭게 달린 그 순간 윤희는 알았다. ‘결국 내가 힘들 때 찾는 것도 달리기구나.’ 다시는 달리지 않겠다던 다짐은 그렇게 무너졌다. 달리기는 윤희에게 훈련이나 의무가 아니라, 가장 본능적인 언어였다.
이후 윤희는 ‘코치 아이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2012년 가을부터 나이키와 함께 러너들을 안내했고, 2015년 나이키 런 클럽(NRC) 론칭과 함께 활동을 넓혔다. 러닝 훈련을 기획하고 수많은 러너들의 첫 달리기를 이끌며, NRC 앱의 오디오 가이드 런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제는 누군가의 첫 완주와 숨결에 귀 기울이는 일이 더 큰 기쁨이 되었다.
“선수·러너·코치, 이름은 달라도 결국 모두 제 러닝이었어요.”
2015년 뉴욕에서 열린 나이키 글로벌 코치 교육은 시야를 더 넓혀주었다. 임신한 몸으로 달리는 여성 코치들을 보며 ‘몸의 변화와 달리기가 함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실제로 임신 기간에도 꾸준히 달렸고, 출산 후에는 두 살이 된 이솜이를 유아차에 태워 남편과 함께 달렸다. 여느 때 처럼 유아차를 밀고 달리던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아이가 담요 사이로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잡으며 웃었고, 그 순간을 떠올리며 윤희는 말했다. “그때 느꼈어요. 우리 가족이 한 팀이라는 것을요.”
공동체는 또 다른 힘이 되었다. ‘서울 비너스’에서 윤희는 코치로서 마라톤 준비나 동계 시즌 훈련을 돕기도 했고, 러너로서 함께 뛰기도 했다. 이곳은 임신 중에도, 아이와 함께여도 늘 환영해 주는 공간이었다. 트랙 옆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이 달리는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비너스에선 제가 코치이기 전에 그냥 같이 뛰는 러너였어요.” 그 따뜻함은 윤희가 러닝을 계속할 수 있게 보듬어주었고, 동시에 앞으로의 달리기를 꿈꾸게 했다.
윤희의 다음 챕터는 ‘오래 이어가는 달리기’다. 속도보다 일상 속에 스며드는 지속. 그래서 ‘아이린의 조깅클럽’ 을 열고,『 조깅의 기초』도 직접 번역했 다. 초심자들에게 그는 늘 강조한다. “꼭 5km가 아니어도 돼요. 러닝화를 신고 집 밖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시작이에요.”
호주, 멕시코, 미국 등 해외 여성 코치들과의 교류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여성의 생애 주기를 고려한 훈련법, 몸의 신호를 존중하는 문화. 윤희는 언젠가 한국에서도 그런 흐름이 자리 잡길 바란다. “여성은 자기 몸을 더 섬세하게 알고 있어요. 그게 오히려 장점이죠. 그래서 더 잘, 더 오래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금 느려도, 잠시 멈춰도 괜찮다. 다시 호흡을 맞추고, 또 한 발 내딛으면 된다. 이제 윤희에게 달리기는 기록이 아니라 삶 자체다.
“저는 계속 달렸던 거예요. 다만 여러 이름들로 달리고 있었을 뿐이죠. 숨을 쉬듯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일상, 그게 제가 믿는 러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