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떠나는 정치, 자격 없다
[벌거벗은 남자들]
지난 4일, 조국혁신당 대변인으로 늘 섰던 그 자리에 강미정 대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섰다. 혁신당 당내 성폭력 사건에 대해 고발하고, 탈당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이었다. 떠나는 그가 남긴 한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정의는 왜 이렇게 더디고, 불의는 왜 이렇게 신속합니까?
곧바로 혁신당은 입장을 밝혔다. 4월 성추행 및 괴롭힘 사건 신고가 접수되자, 외부 조사기관 조사를 진행하고, 당 외부 인사로 구성된 ‘인권 향상 및 성평등 문화 혁신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외부 조사기관의 조사 결과를 100% 수용해 윤리위원회 징계 절차를 착수했다는 것이다. 김선민 전 당대표 권한대행 역시 7일 “절차와 원칙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가해자 2명은 징계를 받았지만, 제명이 된 1명 외에 1년 당원 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가해자는 내년 6월 지방선거 직후면 복귀 가능하다. 하지만 피해자와 조력자는 당을 떠났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제대로 된 분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2차 가해와 괴롭힘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절차는 있었으나 보호는 없었다.
피해자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당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쏟아진 공격이었다. “당을 흔드는 것들”, “배은망덕하다”는 낙인과 조롱은 고위 당직자의 입에서조차 흘러나왔다. 이규원 혁신당 전 사무부총장은 방송에 나와 “성희롱은 범죄는 아니다”라고 발언했고, 황현선 전 사무총장 역시 2차 가해 비판을 받고 사퇴해야 했다. 사퇴하는 황 전 사무총장은 사건의 명칭을 ‘강미정 씨 성 비위 사건’이라고 칭하며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생략했다.
이런 양상은 낯설지 않다. 박원순 전 시장, 안희정 전 지사, 장제원 전 의원 등 우리 정치사에서 정당을 가리지 않고 반복됐던 권력형 성범죄 모두 비슷한 양상이었다. ‘조직과 진영’을 위한다는 이유로 피해자는 침묵을 강요받았고, 용기를 갖고 피해를 공식화 했을 때 피해자들은 역시 ‘조직과 진영’을 흔든다는 이유로 공격당하고 배제돼 왔다. 2018년 안희정 성폭력 사건 당시 김어준 등 민주당 지지자는 미투 공작이라며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모두 범죄 사실을 부정했다. 이번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혁신당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된 김보협 전 수석대변인은 장문의 입장문을 통해 가해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심지어 사실과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법적인 조치를 준비하겠다고 말하는 등 피해자와 조력자에게 압력으로 느껴질 발언 역시 잊지 않았다. 이에 대해 혁신당은 김 전 대변인에게 자중할 것을 당부했는데, 이는 강 전 대변인의 기자회견 이후랑은 너무 다른 모습이다. 강 전 대변인의 기자회견 직후 당은 반박문을 누리집과 SNS에 게시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 위원장은 교수 시절 ‘피해자 보호’와 ‘2차 가해 차단’을 강조하는 성범죄 관련 논문을 다수 집필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원칙은 정작 자신의 당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형식적인 절차만으로는 권력형 성범죄를 뿌리 뽑을 수 없다. 정치권에서 성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권력을 지키려는 집단적 논리가 피해자를 배제하고 2차 가해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을 드러내고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조직을 흔드는 행위’로 치부하는 인식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고 피해자 보호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일은 조직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민주적이고 성평등한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정치권에서 권력형 성범죄가 사라질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하지 않으면 혁신당은 피해자를 떠나보낸 자격 없는 정당으로 남을 뿐이다.
제안하는 실천 방안은 세 가지다. 첫 번째로는 주도적으로 2차 가해 했던 인물은 당의 중책과 공직을 맡을 수 없게 엄중한 인사 원칙을 세워야 한다. 당 내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려 했던 박지현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과 김지은씨 역시 이러한 조치 없이는 정당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러 차례 지적해온 바 있다.
두 번째는 매뉴얼과 프로토콜이다. 신고 및 피해자 보호 매뉴얼을 촘촘히 구성해야 한다. 피해 사실을 신고할 수 있는 창구를 다양한 경로로 마련하고, 가해자 분리 조치부터 상담 및 의료 등 복지 지원과 함께 피해자의 회복과 일상 복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제도를 촘촘히 설계해야 한다. 여기에 있어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나 ‘한국여성의전화’ 등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다양한 기관의 매뉴얼을 참고해보길 권한다.
마지막으로 조직 내에 성평등 문화를 일상에서부터 자리 잡게 만들어야 한다. 녹색당을 비롯한 여러 정당에서는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함께 읽고 다짐할 수 있는 ‘평등문화약속문’을 만들어두었다. 조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상적 사건에 있어 이러한 약속문의 가치를 중심으로 진행될 수 있게 한다면 권력형 성범죄 예방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시는 이 같은 권력형 성범죄가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 혁신당 성폭력 사건과 2차 가해로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 깊은 위로와 진심 어린 연대를 전한다. 부디 피해자와 조력자 모두의 아픔이 잘 회복되고 하루 빨리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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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