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국 유일 지역구 여성중증장애인 김경미 도의원...“정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
[내 삶을 바꾸는 풀뿌리 생활정치] ⑪김경미 제주도의원(더불어민주당) 도의회 성평등 조례·성별 임금격차 해소 등 실질적 성평등 정책 선도 장애와 차별 넘어선 도전...‘일 잘하는 의원’으로 각인 전문적인 의정활동, TV 토론 통해 대중에게 알려져
중증장애인이라는 한계를 딛고 전국 최초로 지역구에서 당선된 여성 정치인 김경미 제주도의원(행정자치위원회, 제주시 삼양·봉개동)은 “정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말한다. 다방면에서 왕성한 의정활동을 하는 가운데 특히 도의회 성평등 조례, 성별임금격차 개선 조례 등을 제정하며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고 있다. 김 의원은 2018년 비례대표를 거쳐, 2022년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한 전국 유일의 선출직 여성 중증장애인 정치인이다. 그는 2003년부터 제주지체장애인협회 부설 여성장애인상담소에서 활동하며 장애인 인권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상담소 활동을 통해 본인과 같은 여성장애인의 고통과 구조적 차별을 몸소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권유가 지속됐다. “2006년 선거를 앞두고 현애자 국회의원이 찾아왔어요. 민주노동당 당헌·당규는 여성중증장애인에게 비례대표 1번을 주게 돼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정치의 ‘ㅈ’자도 모른다”며 손사래를 쳤다.
“정치는 내 옷”...비례대표에서 지역구로
그러나 주변의 설득은 끈질겼다. 2014년에는 새천년민주연합으로 출마 제안이 들어왔다.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회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100인의 선거인단 투표 결과 최종 후보에서 탈락했다. “정치의 룰도 모르면서 도전했다는 게 부끄러웠어요.” 최고위원회에 이의제기하면 구제될 수 있다는 조언을 뿌리치고, “4년간 제대로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며 도의회에 입성했다. 10년 동안 도망쳤던 정치는 그에게 새로운 삶의 장을 열어주었다. “막상 해보니 정치가 내 옷 같았어요. 너무 재밌어요.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세계죠.” 김 의원 옆에는 비슷한 연배의 활동 보조인이 그림자처럼 함께 했다. 의회에서 별도로 지원하는 인력이다. 그와 함께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특수차량도 주어진다.
그는 일찌감치 지역구 출마를 결심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행보였다. 당시 민주당이 지역구 후보가 없던 도심 지역으로 이사하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학연, 지연, 혈연 아무것도 없었어요. 지역구 선거가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고 다들 말렸죠.” 전문적인 의정활동과 TV 토론에 많이 나간 덕분에, 이사 간 지역 사람들이 김 의원을 ‘일 잘하는 의원’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저를 한번 본 분들은 누구나 기억하니 중증장애인에겐 큰 강점이죠.”
“장애인 당사자 후보가 주도한 선거전략이 통했다”
휠체어를 탄 채 지역 선거운동을 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지역 식당이나 경로당 등 유권자 접점 대부분이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중증장애후보 선거를 치러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주도하던 선거캠프는 처음부터 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다. “선거운동 기본이 인사인데, 휠체어로 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제가 나서서 모든 선거운동 방식 자체를 바꿔야 했죠.”
유세차를 발 삼아 주민들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했다. 유세차에 오른 채 휠체어에 앉아 마이크를 잡고 담장 너머 주민들과 인사를 나눴다. 거리에서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식당에서 식사하는 사람, 운전 중인 사람에게 인사를 나눴다. 두 딸의 도움도 컸다. 작은딸은 선거사무실을 책임졌고, 큰딸은 사위와 함께 식당과 경로당 등을 돌았다.
비장애인에 비해 중증장애인은 선거 비용도 더 많이 든다. 사무실은 반드시 1층에 있어야 했고,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유세차량을 임대해야 했다. 그러나 2022년부터 지방의원 예비후보도 후원회를 설립할 수 있게 되면서 숨통이 트였다. 시민들의 1만원 릴레이 후원으로 선거비용 제한액의 절반을 채웠다.
“저도 모르는 자원봉사자들이 너무 많이 도와줬어요. 민주당 동료의원은 물론 국회의원들이 오셔서 유세를 해주셨어요. 그분들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어요.”
성평등 의정활동으로 제도 바꾸다
당선 이후 그는 누구보다 성평등 정책에 앞장섰다. 2018년 의원 연구모임 ‘제주성평등포럼’을 창립하고, 여성계·학계·인권단체 등이 함께하는 젠더 거버넌스를 구축했다. 포럼 대표를 맡아 정책 세미나·토론회·독서 모임 등을 주도했고, 제주가 3년 연속 여성친화도시로 선정되는 데 기여했다.
2019년에는 전국 최초로 제주도의회 성평등 조례를 제정했다. 이로 인해 발의되는 모든 조례는 성별영향평가를 거치게 됐다. “각 상임위 전문위원들이 의무적으로 성별영향평가를 해야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어요. 도의원들과 의회 직원들 대상으로 하는 성별영향평가 교육도 필수에요.”
2023년에는 행정사무감사를 통해 제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전국 상위권인데도, 성별 임금격차는 전국 최하위 수준임을 지적했다. 이어 성별임금격차 개선 조례를 발의해 실태조사·정책 수립·개선 권고 및 모니터링까지 포함한 실행계획을 명문화했다. “공공기관뿐 아니라 민간 영역까지 포함시켜 제주 전체의 임금 구조를 분석하도록 설계했어요.”
제주도는 현재 실태조사 용역을 진행 중이며, 결과를 바탕으로 산업별·직종별 격차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공공부문은 자율적 목표를 설정하고, 민간은 인센티브 기반의 자율 개선을 유도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실현하고, 성인지 임금지표를 도입하는 등 구조 개선이 핵심입니다.”
가난과 차별을 견뎌낸 삶이 만든 정치...의정활동 성과 인정
그는 여러 해에 걸쳐 다양한 수상 실적도 쌓아왔다. 2019년에는 (사)시민이 만드는 생활정책연구원이 주관한 ‘제2회 깨알정책대상’, 2020년에는 한국공공자치연구원이 주관한 ‘제14회 대한민국의정대상 최고의원상’, ‘전국여성지방의원네트워크 우수의정’ 대상을 받았다. 2022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일자리 창출 지원에 관한 조례로 ‘제18회 한국지방자치학회 우수조례상’ 장려상을 수상했다. 2024년에는 ‘제22회 한국지방자치학회 우수조례상’ 우수상, ‘제2회 한국 ESG대상’에서 의회부문 대상, ‘2024 양성평등정책대상’에서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상을 받았다. 2025년에는 제주카메라기자회가 주최한 ‘2024 올해의 의원상’을 받으며 의정활동의 성과를 대내외로 인정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겪은 극심한 결핍과 차별의 상처는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걸을 수 없게 됐어요. 통학 택시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학교 가지 말라며 책가방을 불태워버린 적도 있어요.” 초등학교는 어머니가 업고 다녔고, 3학년부터는 친구 도움을 받아 목발을 짚고 걸어다녔다. 중학교는 집에서 멀어 등교할 땐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고, 올 때는 친구에게 의지해 두 시간 넘게 걸어 돌아왔다. 당시에는 휠체어도, 전동차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한 택시회사가 중증장애학생 셋을 무료로 등하교를 시켜 줬다.
중학교 때까지는 나름 공부를 잘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당시 장애 학생은 신체검사에서 대학 문턱을 넘기 어려웠다. 방황하면서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학교에서 장학금을 챙겨줬다. 고3 때 직접 청소년 봉사단체 ‘소철연합단’을 만들고, 제주 최초의 수화 공연을 기획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모의 옷가게에서 2년 동안 일하며 돈을 벌었다. 다시 제주로 돌아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가게를 열었다. 다시 수화 공연, 수어교실 등을 이어가며 공연 수익금은 맹아학교에 장학금으로 전달됐다. 봉사단체에서 지체장애인협회 청년부와 결연을 맺으며 활동하다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고, 두 딸을 낳았다.
여성장애인 상담에서 단체 연대활동가로
육아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아기를 안고 업을 수가 없으니 우울증이 왔어요. 남편이 정말 고생했죠.” 남편은 그에게 방송통신대 진학을 권했고, 대학 졸업장은 여성장애인상담소 취업의 열쇠가 됐다. “남편 말이 ‘신의 한 수’였다고(웃음). 상담소 입사 자격이 대졸이었거든요.”
어렵게 얻은 일자리었지만 사표를 내기도 했다. 여성단체와의 연대활동이 필수적인데 상담소가 지체장애인협회 부설 기관이라 여성 대표성과 단체의 독립성을 갖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단체 대표는 그 때마다 사표가 반려시키며, 그가 원하는 활동을 펼칠 수 있게 힘을 실어줬다. 2005년부터 소장직을 맡게 됐고, 2009년 전국여성인권상담소시설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2012년에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장애인의 ‘노력 신화’ 경계...“나 같은 사람이 더는 나오지 않아야”
한번은 장애인 당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솔직히 털어놨다. 자살 시도한 얘기까지. “그 자리에 미리 와 다음 강사가 제 얘길 듣고 ‘이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판단해 지역 정치권에 저를 알리기 시작했대요.”
김 의원은 자신의 인생사가 마치 모든 장애인이 노력만 하면 극복할 수 있다는 식의 ‘노력 신화’로 소비되는 것을 경계한다. “나 같은 사람이 더는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제 정치의 출발점이자 목표에요. 사회가 구조적으로 평등하고, 누구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의 역할입니다.”
김 의원은 내년 지방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치는 계속할 거예요. 선출직 중증장애여성 정치인이라는 이정표를 세운 이상, 그 책임을 끝까지 완수할 겁니다.” 삶의 여정을 듣고 난 후 그의 스토리뿐 아니라 밝은 표정과 쾌활한 목소리가 인상 깊게 남았다. 어쩜 그렇게 밝을 수 있는 지 그 비결을 물었다. “상담소 활동을 오래 하면서 제 안의 상처가 다 치유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