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 폭력, 왜곡된 남성문화가 만든 비극
[벌거벗은 남자들]
이틀에 한 명씩 사람이 죽는다. 한국여성의전화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 내 여성 살해 사건은 181건이었다. 올해도 다르지 않다. 7월 말 언론에 보도된 여성살해 사건만 4건이다. 그리고 그중 3건은 전 애인에 의한 살인이었다. 매일 연달아 보도되는 뉴스를 보고 있으면 전부 하나의 사건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최근 이재명 정부가 스토킹 범죄와 데이트 폭력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경찰청이 스토킹 관련 법률 개정을 추진하고 있고 여성가족부는 여성폭력방지법 시행령 개정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 내 여성 폭력을 실질적으로 예방하기 위한 실마리는 일상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특히 남성들의 왜곡된 연애관과 남성문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전한 이별과 왜곡된 남성문화
교제 폭력은 단순한 개인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왜곡된 남성문화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애의 참맛은 서로를 구속하는 것”이라는 말이 농담처럼 소비되는 것처럼 우리는 오랫동안 사랑을 소유와 통제로 이해해왔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서 “남성들은 유대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여성을 대상화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여성을 통제, 소유의 대상으로 관습이 남성들 사이의 동질집단 규범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파트너는 존중해야 할 상대라기보다 소유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문제는 갈등이 발생할 때다. 내 것이어야 하는 내 애인, 파트너가 감히 나를 거절하려고 할 때,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할 때 남성들은 분노와 억울함을 경험하기 쉽고 이는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여성들은 ‘안전이별’을 꿈꾸게 된다. 한 친구는 연상의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에 스토킹에 시달렸다. 그는 끊임없이 연락했고, 번호가 차단당하자 친구의 집에 편지를 보냈다. 심지어 친구는 일면식도 없는 전 남자친구의 직장 후임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우리 대리님 힘들어하세요. 형수님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세요.” 친구는 집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헤어진 남자친구가 서 있는 악몽을 몇 번씩이나 꾸었다고 했다.
단순히 지인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스토킹 범죄로 신고된 피해자는 총 13,075명으로, 하루 평균 35명에 달한다. 112 긴급신고 기준으로도 신고 건수는 2023년 기준 불과 2년 만에 4배 이상 폭증했다. 이러한 수치는 교제 폭력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에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관점의 전환이 시급하다
친밀한 관계, 특히 연인 사이의 갈등을 가볍게 웃어 넘기거나 로맨스로 미화하는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성과 연애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는 청소년기에야말로 올바른 교육이 절실하다. 성, 젠더, 관계, 권리, 건강, 다양성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성교육은 ‘동의’와 ‘경계 존중’을 핵심 주제로 다루며 친구, 가족, 연인 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함께 가르친다. 이를 통해 청소년은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이는 곧 성폭력과 데이트 폭력을 예방하는 토대가 된다. 이를 증명하듯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4년 여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설문조사 응답자인 만 19세 이상 성인 여성 7,027명은 여성폭력 문제 예방의 방법으로 ‘아동·청소년기 때부터 이루어지는 폭력예방교육 마련 및 실시’(35.6%)를 1순위로 꼽았다.
교육과 더불어 제도적 장치의 개선 또한 시급하다. 특히 여성 살해에 관한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가 아직 없다. 현재는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따라 여성가족부가 실시하는 여성폭력실태조사가 있긴 하지만 친밀한 관계 내의 남성에 의해 죽는 여성이 몇 명인지를 정부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여성가족부가 지난 7월 발표한 '제2차 여성폭력방지정책 기본계획'의 2025년도 시행계획에 이 부분이 명시되어 있다. 하루 빨리 교제 살인의 현황과 주요 원인을 분석하고 대응책이 마련되길 바란다.
바꿀 수 있는 비극, 새롭게 만들어갈 문화
교제 폭력과 살인은 우리 사회의 구조와 왜곡된 남성문화가 함께 빚어낸 비극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변화는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일상 속 작은 실천들이 모이고 교육과 제도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폭력을 막을 힘이 생긴다.
청소년기에 성평등한 관계를 배우고 미디어에서 폭력을 로맨스로 소비하지 않으며 남성들이 서로를 증명하기 위해 여성을 도구화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정부가 정확한 통계를 내고 제도적 대책을 세운다면 그 변화는 더 빨라질 것이다. 더 이상 ‘안전이별’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사회, 여성들이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사회는 결코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문화를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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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