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형 성별영향평가...행정과 도민의 삶을 바꾼다
[공동기획 : 여성신문-제주특별자치도] ②성별영향평가 정책개선 권고안 이행률 80.4%…실행력 강화로 성평등 행정 뿌리 내려 500만원 이상 홍보물까지 의무 평가…주민 체감형 우수사례도 확산 중장기계획 성별영향평가도 올해 12건 예정
제주도는 어느 시도보다 성평등 정책이 돋보이는 곳이다. 전국 최초로 ‘성평등(여성)정책관’을 신설한 이후, 다양한 정책 브랜드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본 기획을 통해 제주형 성평등 정책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오영훈)가 추진하는 ‘성별영향평가’는 명목상 제도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성평등 행정 기반을 다지고 있다. 2024년 정책개선 권고안 이행률이 대폭 상승했고, 성인지 행정은 읍면동 단위까지 퍼졌다. 성별영향평가 대상사업 조기 선정과 협업 강화, 제도 고도화에 힘입어 정책 실행력이 한층 높아졌으며,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평등 정책으로 구체화됐다.
성별영향평가는 2002년 여성발전기본법 개정으로 법적 근거가 마련된 이후 2005년부터 지방정부에서 본격 시행됐다. 정책을 수립·시행하는 과정에 성별에 따른 차이를 분석하고 성평등 관점에서 개선안을 도출하는 제도다. 하지만 공직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를 행정 부담이나 형식적 요건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제도의 실효성보다 평가 자체를 위한 형식적 절차에 치우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성가족부는 지자체에 지침을 제공하고 성별영향평가센터를 운영해 제도 안착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평가 결과의 실제 정책 반영, 부서 간 협업, 관련 제도 간 연계 미흡 등이 현장의 주요 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실무자의 업무 부담, 개선안의 실행력 부족 등은 제도의 내실화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해왔다.
성별영향평가 시스템 고도화, 정책개선 권고안 이행률 80.4%까지 이끌어
제주도는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실행력을 중심으로 정책 구조를 정비했다. 정책기획 초기 단계에서부터 성별영향평가를 구조화하고, 실행력을 제도적으로 담보하는 방향으로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2024년 제주도의 성별영향평가 정책개선 권고안 이행률은 80.4%로, 2023년 46.2%에서 대폭 상승했다. 이는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전국 평균(51.7%)을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제주는 사업계획이 수립되기 전에 성별영향평가가 선행될 수 있도록 대상 사업 선정 시점을 2~3월로 앞당겼다. 기존에는 7~8월에 사업 선정이 이뤄져 정책개선에 반영하기 어려웠다. 조기 선정은 정책개선 이행률을 높이고, 실무자와 전문가 간 협업을 가능케 했다.
모니터링단 운영, 외부 전문가 평가, 부서 간 협업체계도 성과를 뒷받침했다. 4급·5급 모두 전문 임기제 공무원으로, 성주류화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문인력과 관련 부서 간의 협업체계를 강화하고, 실무자의 정책 실행력을 높이는 구조적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지역 기반의 활동 경험이 풍부한 전문 컨설턴트가 실무 공무원과 협력해 평가의 실효성을 높이고 있다. 컨설턴트들은 성인지적 분석과 개선안 설계에 직접 참여하며 사업의 기획부터 집행, 환류까지 전 과정에 긴밀히 개입하고 있다.
주민자치센터...성인지 감수성이 내재된 포용적 커뮤니티 공간
제주는 각 부서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를 바탕으로,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연구진과 협력하여 성별영향평가 개선권고안 이행여부를 심층 모니터링하고 있다. 이렇듯 체계적인 점검과 분석의 결과, 2024년에는 총 6건의 우수사례가 도출됐다. 그중 제주시 삼도1동 주민자치센터 운영 사업은 도민 체감도가 높은 최우수 사례로 선정돼 주목을 받았다.
주민자치센터는 도민의 일상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공공 공간으로 제주시 삼도1동은 이 공간을 성평등한 지역공동체 형성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다양한 성별 수요를 반영한 맞춤형 프로그램 기획과 운영을 추진해왔다.
이를 위해 제주는 지역 주민 회의, SNS, 만족도 조사 등 주민 소통 채널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프로그램 선호도 및 이용 실태를 주기적으로 수집·분석하고 있다. 이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참여율이 낮은 프로그램은 성별 특성을 고려해 주제와 운영 방식을 조정한다.
모든 프로그램 만족도 조사에는 ‘성차별 요소 존재 여부’ 항목을 포함시켰다. 성 불평등 요소를 사전에 점검하고 개선하는 체계를 마련함으로써 남녀 참여의 균형과 수혜의 형평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
성별영향평가를 통해 주민자치센터의 역할이 단순한 행정서비스 제공을 넘어, 성인지 감수성이 내재된 포용적 커뮤니티 공간으로 전환됐다.이러한 성과는 읍면동까지 성인지 행정을 확산시킨 ‘양성평등담당관제’의 제도적 기반이 실제 효과로 나타난 사례로 평가된다.
민관 협업을 통한 실행력 강화, 500만원 이상 홍보물까지 의무 평가
제주는 사업비 500만원 이상이 투입되는 영상, 리플렛 등 모든 홍보물에 대해 성별영향평가를 의무화했다. 작년 성별영향평가위원회에서 홍보물과 주요계획에 대한 성별영향평가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이 제안은 그해 12월 양성평등위원회의 정책개선 권고 대상으로 채택되며 제도화로 이어졌다.
올해 2월 이은영 성평등여성정책관이 도지사 주재 회의에서 이 같은 계획을 공식 발표했고, 전 부서에 실시간 영상으로 공유됐다. 이어 ‘홍보물 및 보도자료 성별영향평가 실천 안내서’를 제작·배포해 실무자들이 홍보물 제작 초기 단계부터 성인지 관점을 반영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안내서에는 체크리스트, 문안·이미지 기준, 개선 사례 등이 담겨 있어 실효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결과 홍보물에 대한 성별영향평가 건수는 작년 9건에서 올해 6월 현재 99건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교통항공국은 도내 모든 버스 영상홍보물에 대해 성별영향평가를 필요 절차로 지정하고, 평가 이후 콘텐츠를 송출하고 있다. 이를 통해 행정 전반의 홍보물에 성인지 감수성을 내재화하는 기반이 마련됐다.
또한 기존에는 권고 수준에 머물렀던 3년 이상의 중장기계획에 대해서도 성별영향평가를 하도록 했다. 정책 수립 초기 단계에서부터 성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도지사의 방침에 따라 중장기계획에 대한 성별영향평가는 2024년 1건에서 2025년에는 12건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주요정책에 대한 특정성별영향평가...성인지 정책 확장
제주도는 정책 수혜 범위가 넓거나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정책을 대상으로 하는 특정성별영향평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매년 1개 과제를 선정해 제주여성가족연구원이 심층 분석을 수행한다. 이후 성별영향평가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정책개선 권고안으로 연계하는 방식이다. 이 또한 부서별 개선권고 과제 이행상황을 점검함으로써 대단위 사업 또한 도정 방향에 맞는 성인지 관점을 반영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2023년에는 도시재생사업을 평가해 총 23건의 정책개선 권고 사항을 도출했다. 여성친화형 도시재생 시범사업 추진이 권고돼 각 부서별로 여성안심귀갓길, 돌봄공간, 여성창업 지원 등이 현실화됐다. 2024년에는 성·재생산 건강정책과 건강증진사업을 평가해 생애주기별 건강서비스 강화, 의료서비스 접근성 제고, 성인지 통계 강화 등 구체적인 개선안이 제시됐다. 2025년에는 청년정책을 선정해, 성별 관점에서 청년정책의 사각지대와 수요를 발굴하고 있다.
정책의 흐름을 바꾸는 제주형 성주류화
제주의 성별영향평가 정책은 정책 수립부터 집행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성인지 관점을 내재화하며,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끌고 있다. 행정 각 단계에서 ‘누구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까’를 성별 관점에서 성찰하고, 불평등을 사전에 차단하는 구조를 형성한 것이다.
제주는 정책 형성과정 전반에 성별영향평가를 전략적으로 확대 적용함으로써 정책 형평성과 수용성을 제고하고, 실질적인 성평등 실현을 위한 행정 혁신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성주류화가 모든 정책의 기본값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전국적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