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의자의 죽음, ‘피해자 탓’ 하는 사회 온당한가
[이은의 변호사의 시선]
준강간 등 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장제원 전 국회의원이 사망했다. 언제나 그래 왔듯 피의자가 선택한 죽음을 향한 사회의 시선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한편에선 무책임한 선택이라고 비판했지만, 피의자의 주변인들을 비롯한 다른 한편에선 비통함과 안쓰러움을 전했다. 이런 경우 ‘애도’가 먼저라고 하는 측에서는 ‘죽음으로 죗값을 치렀다’라거나 ‘죽은 것과 범죄를 저지른 것은 다르다’라고 한다. 틀린 말이기도 하고 맞는 말이기도 하다. 피해자가 있는 형사 사건에서 가해자의 극단적 선택은 적어도 범죄는 책임지지 않겠노라는 선택이자 선언이다. 그러니 그 죽음은 죗값과 무관하고, 당연히 범죄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순리에 따르지 않은 죽음에는 망자와 그 주변인들의 원망이 남는다. 무고한 이의 억울한 죽음이 공분을 사는 것은 당연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정서는 다소 독특하다. 가령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이 알려지면 그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쏟아지다가도, 그 사람이 죽으면 돌연 그를 동정하며 안타까워한다. 사람의 죽음 자체를 향한 개인적인 씁쓸한 소회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걸 넘어 그 죽음을 사회적으로 억울하고 비통한 것처럼 해석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더구나 가해자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두고 누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며 탓할 대상을 찾는다. 한국에서 공적 지위가 있거나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 가해자인 성범죄 사건에서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변호사가 되고 성폭력 사건을 주로 다뤄 왔다. 미투 열풍이 일어나자 피해자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속에서 기소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 증거가 갖춰진 사건들에서 피해자를 지원하다가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때마다 피의자 주변인들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비난과 원망을 보내 왔고 관련 기사에는 악플(악성댓글)이 쏟아졌다. 그런 일들은 그때로 끝나지 않았고 소리 없는 아우성 정도에 그치지도 않았다. 죽은 피의자와 무관한 온갖 사건들에서 피고인의 변호인들은 그런 가해자의 죽음이 피해자 변호사였던 내 탓인 것처럼 폄훼하고 모욕하며 자기 피고인이나 의뢰인의 선처를 호소했다. 피해자가 직접 인터뷰한 기사가 나간 후 피의자가 사망하자 평소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듯 했던 여성 기자는 피해자 변호사의 과도한 언론 플레이가 가해자를 죽게 했다는 칼럼을 싣기도 했다. 가해자가 책임을 피해 달아난 죽음으로 졸지에 피해자의 말은 가해자에 대한 음해가 되었고, 피해자가 한 인터뷰를 실은 기사는 피해자 변호사의 언론 플레이가 되었다. 보이는 게 이만큼이니 보이지 않는 편견과 혐오는 훨씬 더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그나마 다행이자 유일한 위안은 피해자의 신원이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에서 그 욕받이 탓받이를 혼자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가해자의 죽음에 경도된 사람들은 가해자의 죽음을 두고 죗값을 치렀다고 하지만 그 말이 틀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그 죗값을 피해자가 물었다고 생각한다. 가해자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잘못이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에 대한 문제 제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범죄 피해를 입고 고작 말을 했을 뿐이다. 고작 피해자가 바라는 것은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에 대한 형사 책임을 지라는 것뿐이다. 그런 말도 감당하기 어려워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하여 피해자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하는 문제 제기나 시기, 방법 등을 탓하는 것이 온당한가? 그 온당하지 않은 ‘피해자 탓’에는 성범죄를 두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과실상계를 하는 비뚤어진 시선이, 자발적 죽음에 대한 한국 사회의 비합리적인 연민이 존재한다.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한 성범죄 사건들 중 피해자가 피의자에게 죽으라고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기실 성범죄 가해자가 책임을 피해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 자신의 선택이고, 그를 독려한 것은 성범죄를 두고 피해자에 대해 과실상계하는 비뚤어진 사회였다. 그래서 어느 성범죄 피의자의 자발적 사망에 대해서도 답답할 뿐 애도하지 않는다. 애도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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