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은 어쩌다 포르노의 대표 소재가 됐나
[벌거벗은 남자들]
몇 달 전, 나는 도쿄에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했다. 퇴근 시간대라 객차는 사람들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릴 예정인지라 문 근처에 가까이 다가가 선 그 순간, 음습한 무언가가 내 다리 사이를 훑고 지나가더니 이윽고 속옷 위를 짓눌렀다.
손은 금세 빠져나갔기에 실수이겠거니 싶었으나 이후 다시 들어온 손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이게 세 차례나 이어지자 눈앞이 하얘지며 온몸이 굳어버렸다. 가까스로 열차에서 내려 뒤를 돌아봤을 땐 나를 바라보는 몇몇 남성 중 누가 가해자인지를 특정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만원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두려워졌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누군가가 뒤에 서 있기만 해도 불안감과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런 경험은 나만 겪은 일이 아니다. 지난해 일본 정부가 16세~29세 3만6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10명 중 1명은 공공장소에서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 피해자의 90%가 여성. 범행 장소의 3분의 2가 지하철이었다.
지하철과 포르노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왜 유독 지하철에서 더 많은 치한 행위가 벌어지는가? 실제 지하철 성범죄는 포르노와 밀접한 연관성을 띤다. 일본의 러브호텔을 살펴보면 열차 내부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곳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또한 지하철 성추행을 소재 삼아 제작된 포르노 영상물 역시 꾸준한 인기를 끌며 포르노계의 단골 소재로 자리한 지 오래다. 지하철뿐만이 아니다. 병원, 교실, 가정집 등 포르노의 소재는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며 대상 역시 간호사, 교사, 직장 동료, 이웃 주민 등 일상에서 흔하게 조우할 수 있는 여성들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과연 이 같은 포르노를 통해 성적 페티시를 충족하는 것이 옳은 길인가? 어떤 이들은 포르노가 더 많이 존재하고 보편화될수록 실제 일상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비율이 줄어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포르노에 자주 노출될수록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은 감소하고 잘못된 성 관념을 답습하며 조금씩 성범죄의 수위를 높이는 등 자신의 쾌감만을 좇게 된다.
포르노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숱한 혐오와 폭력이 가해지는 걸 단순한 페티시로만 포장할 수 없다. 또한 간호사, 교사 등의 직업군을 성적인 시선으로만 표현해내며 해당 직업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엄연한 폭력이다. 포르노에서 보여주는 자극적인 소재 속에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 잘못된 신념 체계가 구축되고 이것이 범죄 행위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누가 지하철 성범죄를 저지르는가
그렇다면 누가 가해자가 되는가? 이를 살펴보기 전, 지하철이 주는 공간의 특성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지하철은 밀폐된 공간 속, 적지 않은 사람과 몸을 부대낀 채 최소 몇 분에서 최대 몇 시간가량을 함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원치 않는 신체접촉이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지는 한편, 열차 내 CCTV 미설치와 더불어 낮은 화소에선 개인의 인상착의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는지라 설령 그 안에서 성추행이 이루어지더라도 가해자를 특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성범죄는 특별한 사람에 의해 벌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독일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제시하며 악은 지나칠 정도로 보통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범죄 가해자들은 불우한 가정환경과 정신적 병리 현상으로 인해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지만, 실상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을 법한 모습으로 평범하게 학교나 직장을 다니거나 연인이나 배우자를 둔 경우도 섭섭지 않게 볼 수 있다. 가해자를 쉽게 색출해낼 수 없으며 누구든 쉽게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피해자로 하여금 더욱 큰 두려움만 안겨줄 따름이다.
여성, 성적대상 아닌 하나의 인격체
우리나라 또한 지하철 내 성범죄가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 9월, 서울 지하철 경찰대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지하철 내 성범죄는 2020년 874건에서 2023년 1230건으로 뛰었다. 이에 올해 대법원은 공공밀집 장소 추행죄를 기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양형을 강화했다.
하지만 단순히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모든 성범죄가 그러하듯 지하철 성범죄 역시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딛고 올라선 채 자라났다. 왕성하게 자란 나무의 가지만 쳐낸다고 해서서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 그보다는 뿌리에 담긴 배경과 사상을 인지하고 조금씩 생각과 행동을 개선하고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여성을 성적인 대상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고 존중할 수 있게끔 교육하거나 잘못된 성 인식을 바로잡는 등 사회와 개인의 사고 체계 안에 깊게 뿌리박힌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다. 또한 주변인으로서 일상 속 혐오와 조우했을 때 이를 묵인하거나 용인하지 않고 2차 가해를 행하지 않는 것, 피해자를 돕거나 지원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모습이다.
대중교통을 비롯한 병원과 학교, 직장 등은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만큼 반드시 안전이 지켜져야만 하는 공간이다. 안전이 무너지는 순간 일상이 흔들리고 개인은 점점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정부와 세계가 진실로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꿈꾼다면 모두의 일상을 지켜, 여성에 대한 낙인과 성적 대상화를 없애고 단편적인 해결이 아닌 본질적인 해결에 접근해야만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문제를 인지한 이 순간이 가장 빠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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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