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김현영의 S언니정치사] 여자대학의 의미, 박인덕의 경우
[권김현영의 S언니정치사]
1공화국 당시 활약한 소위 ‘여류명사’들은 대부분 여학교를 다녔다. 여류명사라는 말 자체에 이미 중산층 혹은 양반계급 이상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초기 근대여학교를 다닌 학생들 중 양반은 오히려 드물었다. 계급적 특권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기 보다는, 여학교를 졸업하고 공적 영역에서 활동을 할 기회가 생겨 이름이 알려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근대 초반 여성들이 학교를 갈 수 있게 된다는 건 그 자체로 세상에 나간다는 것과 같았다. 때문에 좌우에 따른 입장 차이 혹은 사회참여의 방법에 따른 이견을 막론하고 여학교를 나와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여성교육에 대한 사명을 얘기하는 글과 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근대여학교는 단지 배우고 가르치는 영역을 넘어 근대가 시작된 이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했던 여성들이 만들어낸 최초의 공적 기관으로서 하나의 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여자대학이 만들어온 길
여자대학 공학 전환을 반대하는 동덕여대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 시위 이후 국내 외의 언론에서는 여자대학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기사가 많이 나왔다. 이 질문은 여자라는 이유로 대학에 가지 못했던 시대에는 여자대학의 존재의의가 합의되었을 것이라는 상상에 기반해 있다. 하지만 여자교육기관의 의미와 역할은 한번도 고정된 적이 없다. 여자대학은 만들어진 초반부터 존재의 쓸모를 증명하라는 위협 속에 놓여있었고, 그 속에서 의미를 발굴하고 갱신해가면서 존재해왔다. 여학교의 시작부터 그러했다.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들은 ‘여학교설시통문’을 발표하여 관립여학교의 설치를 요구했는데, 이들이 주장하는 여성교육의 필요는 어머니가 될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이루어졌다.
“만일 여인 교육이 성행하면 사람마다 자식있는 어머니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성인한 후에 어찌 총명한 사람이 되지 아니 하리요.”
1898년 9월 13일 독립신문 논설에 실린 내용이다. 이는 어머니로서 더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해야만 여성교육의 쓸모를 인정해줄 것이라는 당대 가부장제의 조건 속에서 나온 설득 전략이었다. 식민지 여자교육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여자교육의 목적을 아예 한정한다. 1911년 8월 23일 내각총리대신 공작 가쓰라 타로가 공표한 조선교육령 15조에 따르면, 여자교육의 목적은 부녀자의 덕행을 기르고 국민으로서의 성격을 도야하며 그 생활에 유용한 지식·기능을 가르치는데 있다. 여기에서 부녀자의 덕행이란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성역할을 불평없이 수행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하지만 어디 의미라는 것이 칙령이나 법에 붙들려 있기만 했을까. 여성들은 마침내 교육의 기회가 열리자 칙령에 뭐가 적혀있건 원래의 목적을 훌쩍 뛰어넘어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시험하는 길 위에 서서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갔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박인덕의 경우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이후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던 박인덕(1896-1980)의 경우, 읽고 쓰기를 배운 여자가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박인덕에게 여자교육기관의 의미는 각별했다.
“이제난 우리 반도여자들도 기천년간 드럿든 잠을 휠신 깨고 이러나서 밧갓 구경을 하게 되었슴니다. 나가보매 압집 뒤집 건너집 여자들은 벌서 이러나서 야원과 전원에 나아가서 땀을 흘니면서 노력을 합니다. (....) 문명의 새 빗치 반도에 비치이매 우리 여자도 비로서 교육의 맛을 보게 되엿슴니다.” (박인덕, “현대조선과 남녀평등문제”, 동아일보, 1920-4-2)
여고 시절부터 노래 잘하고 연설 잘하고 잘생긴 것으로 유명했던 박인덕은 최초로 위자료를 주고 이혼을 한 조선의 노라, 연단에만 서면 연설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던 만능재주꾼, 일제시기 가장 많은 여행기를 남긴 세계일주가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렸다. 졸업 후 이화에서 기하, 체육, 음악을 가르친 박인덕은 이화의 교가를 짓기도 했는데, 그의 호쾌하고도 거침없는 면모는 그가 작사한 이화학당 제3교가의 노랫말에 잘 드러난다. 가사의 1절은 공식 교가로 쓰기에 부족함 없이 기독교 학교다운 종교적 의례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민족독립의 염원을 담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2절이다. “학업에 힘쓰던 우리 학우들 오늘은 학과를 정지하고 활발한 기상과 기쁜 맘으로 일제히 유쾌하게 놀아보세” 이렇게 대놓고 놀자는 내용을 담은 가사는 역대 이화학당의 교가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교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떠들썩한 결혼과 이혼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재능을 펼쳐나가던 박인덕은 1920년 그의 팬들이 크게 실망할 결정을 한다. 바로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였다. 박인덕은 1919년 3.1운동으로 약 4개월간 투옥되었고 11월에는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수감되는데, 이 두 번의 옥살이 직후 이화학당의 선교사이자 후에 교장이 된 아펜젤러가 제안한 웨슬리안 대학으로의 유학을 포기하고 1920년 청년부호로 알려졌던 김운호와 혼인한 것이다. 혼인 자체도 여고 및 여자대학의 동료와 선후배들이 그다지 반기지 않았던 상황이었는데 김운호은 13세에 이미 혼인을 하여 슬하에 자녀를 두고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세간의 반응은 싸늘했다.
결혼 직후 박인덕은 가정을 깼다는 비난을 받아 강연회나 저술 등 해오던 일이 눈에 띄게 줄었을 뿐 아니라 결혼 한 달 후 김운호의 사업이 연쇄 부도가 나는 바람에 가정경제와 육아, 사회생활을 도맡아서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전봉관,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 <신동아>, 2006-4-10) 하루 14시간씩 노동을 하던 당시 생활에 대해 박인덕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았다고 회고한다. (박인덕, ‘나의 자서전, <여성>, 1939년 3월호) 도망치다시피 미국에 간 박인덕은 미국 생활 당시에도 한달에 20-30원씩 정기적인 양육비를 보내며 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지만 남편이 있는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남편이 주장하는 양육비를 위자료 대신으로 내놓고 마침내 이혼에 이르게 된다. 여고와 여대 시절이 박인덕에게 날개를 달아줬다면 결혼은 박인덕에게 큰 짐이 되었다. 당시 ‘이혼’한 여성이 겪는 오래되고 단단한 구습부터 식민지 근대라는 역사적 상황, 본인 스스로 가진 세계관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박인덕을 가로막는 것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갱신되지 못한 의미
박인덕은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인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명숙, “유관순 열사의 스승 박인덕, 항일 친일 친미를 넘나들다”. 2017-1-23, 민족문제연구소) 이는 ’변절‘이라기보다는 3.1 운동 이후에 ’체제순응적 사회참여‘라는 방향성 속에서 이루어진 필연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1941년 이후 소위 ’여자교육‘을 중시하던 김활란, 고황경, 박인덕과 같은 여성지도자들이 군국주의를 찬양하며 총후부인으로서의 역할을 다짐하게 된 것은 여자대학의 존재 의의를 새롭게 갱신해나가지 못하고 의의를 존재와 유지 그 자체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대학의 의미를 문명의 빛으로 생각하던 박인덕이 생각한 ‘현대’란 당대의 지배자들이 제안하는 주류적 생활방식을 따르는 것과 등치되었다. 미국 유학 이후에는 미국적인 것이, 유학 후 식민지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광범위하게 넓혀가던 1930년대말과 1940년대 초에는 일본적인 것이 곧 박인덕이 생각하는 ‘현대’였다.
박인덕은 1941년 사재를 털어 덕화여숙을 설립하는데 이 여학교의 목적은 결혼 전의 여성들을 교양있는 현대 주부로 양성하는 것이었다.(강정숙,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친일파 99인 2권》, 반민족문제연구소, 돌베개) 박인덕은 후에 덕화여숙의 교장으로서 일제에 협력하여 임전보국단의 간부로서 “군국의 여성을 키우겠다”는 연설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된다.
박인덕이 아니라 유관순으로 다시 쓰는 역사
근대 여자대학의 설립자들 다수는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에 본인들이 설립한 여성교육기관의 폐교를 막고 학교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친일파가 되었다. 박인덕은 어땠나. 박인덕은 3.1운동 당시 같이 감옥에 있던 유관순을 해방 후 중요한 인물로 복원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전보국단에 가입하여 전시에 학생들에게 군인이 될 것을 종용하는 연설을 한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총후부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여자교육기관은 그 존재 의의를 해방 후에 유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설립자가 아니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자대학의 의미가 다시 쓰여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1910년 전국의 90여개 넘게 있었던 여자교육기관의 학생들 대부분은 독립운동을 통해 역사의식을 배웠고 독립운동을 준비하면서 동기와 선후배간의 정을 나누었고, 교사들의 지지와 보호 속에 있었다. 1919년 3.1 운동에는 경성 이화학당의 이문회(李文會), 평양 숭의여학교의 송죽회, 전주 기전여학교의 ‘공주회’, 개성 호수돈여학교의 호수돈비밀결사회 등 여학교마다 조직된 비밀결사대가 적극 가담했다. 감옥에 갇힌 학생을 빼내기 위해 학교측이 많은 애를 썼다는 사실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지금 학생들을 보호하기는커명 학생들에 대한 고소고발을 하는 동덕여대 대학본부와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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