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논단] 탄핵 광장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세계
남태령 고개의 칼바람은 몹시 차가웠다. 동짓날 긴긴 밤도 살을 에는 추위도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헌법적 권리인 집회·시위의 자유를 차벽으로 막아선 경찰의 위헌적 행태를 시민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자유발언에서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고 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수상소감을 많이 인용했다.
폭력적인 경찰의 차벽과 무려 28시간 동안 이어진 봉쇄,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사회적 소수자들의 뜨거운 연대가 공존하는 남태령 현장이 바로 한강 작가가 말한 그 세계였다. 그러나 결국 형형색색 빛나는 응원봉 연대가 경찰의 위헌적 차벽 봉쇄를 갈랐다. 28시간이나 갇혀있던 트랙터는 한강다리를 건너 대통령 관저까지 달렸다. ‘윤석열 체포·구속’, ‘농민헌법 쟁취’ 농민들이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서울까지 전해졌다. 농민들은 “역사는 지난 이틀을 ‘남태령 대첩’으로 기록할 것”이라며 “혐오와 차별 속에 주류사회에서 배제되어온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노인, 도시빈민, 농민이 만든 승리”라고 기록했다.
12.3 위헌·위법한 비상계엄 선포와 이후 국민의힘과 기독교 극력보수집단 등 내란 동조세력들의 행태에 절망을 느끼지만 ‘춤을 추며 절망과 싸울 거야’라며 흥겹게 연대를 이어가는 2030 여성들이 주축이 된 시민들의 모습에서 이미 도래한 새로운 세계를 본다. 탄핵 이후의 사회대개혁을 준비하자 하지만 이미 그 세계는 우리 곁에 와 있다. 남태령이 새로운 세계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혐오와 차별, 폭력이 아닌 모두의 평등과 인권을 이야기하는 탄핵 광장이 이미 그 새로운 세계다.
언제나 여성들은 광장에 있었다. 성소수자도 농민도 장애인도 늘 광장에 있었다. 다만 주류사회가, 기성정치가, 주류언론이 그들을, 그들의 이야기를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중에’ 정치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농민,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배제를 정당화하고 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 폭력을 용인해왔을 뿐이다. 탄핵 광장은 이제 더 이상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정치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시대로의 진입을 알리는 이정표다. 평등한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은 탄핵 광장 참여자에 대한 가이드를 넘어 우리사회 구성원 전체에 전하는 메시지다. 성평등은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밤새 꽁꽁 얼어붙은 속을 녹여주고 싶어 보리차를 끓여 나온 동네 할머니의 마음에서, 각종 음식과 방한용품, 여성화장실에 놓인 위생용품, 심지어 밥차와 난방버스까지 이어진 서로에 대한 살핌과 나눔의 연대 속에서 서로 돌봄의 기쁨과 윤리를 배운다. 모두가 돌보고 돌봄을 받는 돌봄·정의·연대·공존의 아름다운 세상은 광장에서 실천되고 있다. 헌법에 성평등과 모든 시민의 돌보고 돌봄 받을 권리가 명시되고, 시민적 책임과 의무로서 돌봄 개념이 포함될 날은 예정된 미래이다. 기존의 남성생계부양자모델로 설계된 각종 사회 제도와 관행을 넘어, 보편적 돌봄자 모델로 전환하는 ‘모두가 돌봄자-노동자-시민 모델’ 사회는 광장의 힘으로 완성될 것이다.
‘우리쌀밥 안 먹은 사람 있냐?’는 외침에서 농업과 농민들의 삶이 어떻게 시민들의 일상과 생존에 연결되어 있는지 통찰한다. 정체성이 서로 중복·교차하면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챈다. ‘도심권에서의 극심한 교통 불편’을 문제 삼으며 차벽으로 차단·봉쇄한 경찰의 모습에서 누구의 시민권은 부정되고 통제되는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결정하는지, 누가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인지 질문한다. 광장은 이미 현실의 운동까지 바꾸고 있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얼굴을 탄핵 광장의 얼굴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광장의 얼굴과 제도정치의 얼굴을 일치시켜가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이제 이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나와서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이렇게 나오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연대하는 방법과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세상을 바꾼 것은 늘 약자였고 약자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광장에 선 한 여대생의 말이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