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페미니스트들의 ‘처단’ 방식

2024-12-17     이슬기『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공저자, 칼럼니스트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 204표”
“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2024년 12월 14일 오후 5시, 우원식 국회의장의 탄핵안 가결 선포에 이어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지던 그 날의 여의도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옆 여성단체, 성소수자 단체의 깃발이 몰려 있던 이른바 ‘페미존’에 있었다. 그날 오로지 ‘윤석열 탄핵’의 기치 아래 여의도에 모인 페미니스트들은 이어 흘러나오는 ‘다시 만난 세계’에 맞춰 격하게 응원봉을 흔들었다. 권좌에 있던 안티 페미니스트를 페미니스트가 ‘처단’하는 모습이었다.

윤석열 정권 취임 전후로 1년 간 나는 일간지에서 여성가족부를 출입하는 기자였다. 윤석열 취임 직전 여가부가 성차별 타파의 의지는 있으되 작고 미약하여 힘을 못 쓰는 부처에 가까웠다면, 취임 이후의 여가부는 안티 페미니스트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이행하는 부처가 됐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한 줄 공약으로 내걸고, ‘저출산’ 문제의 원인으로 “‘페미니즘이라는 게 너무 정치적으로 악용돼서 남녀 간 건전한 교제 같은 것도 정서적으로 막는 역할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던 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였다.

‘여성가족부 폐지’. 2022년 1월 당시 대통령 후보자였던 윤석열 대통령의 SNS에 올라온 게시글 내용이다 ⓒ윤석열 전 후보 페이스북.

이후 여가부에서는 젠더 기반 폭력이 일어날 때마다 장관의 입에서 “여성혐오 범죄로 보지 않는다”(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거나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다”(인하대 성폭력 사망 사건)는 식의 구조적 성차별을 무화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인하대 사건에 대해서는 이후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정정했다.)

다른 부처도 사정은 비슷했다. 딥페이크 성범죄 피의자의 98%가 남성임에도 “특정 성별을 지정해 피‧가해자로 구분하지 말라”는 공문을 전 학교에 내려 보내거나(교육부), 딥페이크에 관한 성별 통계를 전혀 집계하지 않다가 거듭되는 언론과 의원실의 요청에 가해자 통계만 내놓기도 했다(경찰청).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후 임신중지에 대한 후속 입법은 없었고(보건복지부‧여성가족부), 그나마도 간만에 여가부가 제 할 일을 한 ‘비동의 간음죄’ 도입 논의는 한동훈 현 국민의힘 대표가 장관으로 있던 타 부처의 반대로 철회됐다(법무부).

차별금지법 뿐 아니라 동성애 반대 의사를 공개적으로 피력하는 등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던 이가 ‘인권 최후의 보루’ 기관장에 올랐다(국가인권위원회). ‘저출산’으로 여성들을 윽박지르더니, 육아의 어려움을 해소해주겠다며 돌봄노동을 싼 값에 이주 여성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을 해결 방안으로 들고 나왔다(고용노동부‧서울시). 여가부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성평등 관련 부서나 정책은 폐지 또는 축소의 길을 걸었다. 범국가, 범부처, 범지역적으로 자행된 안티 페미니즘 행보였다.

ⓒ시사IN저널북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면, 2030 여성들이 ‘윤석열 탄핵’의 선두에 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국승민‧김다은‧김은지‧정한울이 쓴 『20대 여자』는 지난 7일 열린 여의도 탄핵 집회의 10명 중 3명이 ‘2030’ 여성인 이유를 알려주는 책이다. 책에 따르면 페미가 ‘낙인’인 현실에서도 20대 여성 10명 중 4명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한다. ‘강한 페미니즘 성향’을 가진 것으로 분류되는 20대 여성도 37.1%에 달한다.

20대 여성은 젠더뿐 아니라 분배‧노동‧환경 등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는 한편 정치 참여도 활발히 벌인다. ‘최근 1년 간 온라인에서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연대 활동을 해봤다’는 응답(14.5%)도 전체 평균(6.3%)의 두 배 이상이다. 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돈을 써본 적이 세 번 이상 있다는 응답(17.3%)도 전체 평균(10.4%)보다 높다. 강한 페미니즘 성향의 20대 여성 4명 중 1명은 사회의 소수자가 겪는 일을 ‘내 일’처럼 느낀다. 구조적 성차별을 온몸으로 겪는 당사자로서, 소수자에 대한 공감이 체화됐기 때문이다. ‘맥락이 제거된 공정’(책 『20대 남자』)이 아닌, 구조와 차별에 민감하며 ‘참지 않는’ 20대 여자의 탄생이다.

지난 12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집회에서 자신을 노래방 도우미로 소개한 한 여성이 탄핵이후에도 “주변의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X캡처

자칭 야구팬‧빠순이‧오타쿠인 20대 여성 김제나 씨가, ‘부산 온천장의 노래방 도우미’ A씨가 집회 무대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제나 씨는 독재 앞에 목숨 걸며 싸우던 앞선 세대를 언급하며 아직도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장애인‧여성‧성소수자‧노동자‧농민‧이주민을 호명했다. A씨는 쿠팡의 노동자, 파주 용주골의 ‘창녀들’, 동덕여대 학생들, 서울 지하철의 장애인, 교제 폭력 피해 여성, 성소수자, 이주 노동자의 아이들, 전라도를 향한 지역혐오를 상기시켰다.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완벽하지 못한 것입니다.” A씨의 말처럼 안티 페미니스트에 대한 ‘처단’은 아직 진행 중이고, 차별과 혐오의 현실도 여전하다. 매일 광화문과 전국에서 열릴 집회와 함께 22대 국회 들어서는 발의도 안 된 차별금지법, 여가부부터 지자체의 부서에 이르기까지 쪼그라든 성평등 추진 체계와 거리의 소수자들을 우리는 계속해서 돌아봐야 한다. 그 선봉에, 온갖 차별의 경험에도 ‘사랑의 응원봉’을 들고 나선 2030 여성이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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