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사이] 여자는 스포츠의 미래다
작년 1월 레전드 농구 만화인 ‘슬램덩크’의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하면서 강백호, 서태웅, 송태섭이 돌아왔다. 90년대를 휩쓴 농구 열풍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이제 기성세대로 호명되는 팬들과 다르게 그 시절의 농구 소년들은 여전히 눈부신 청춘이고 코트 위를 날아다닌다. 그 옛날 슬램덩크 팬들은 열광했다. 누구나 어려서 좋아하던 것을 좀처럼 잊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신극장판이 개봉하면서 기존의 만화책까지 다시 조명받고 새로운 팬들이 유입됐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슬램덩크를 가장 많이 구입한 고객층은 30대 여성이고 다음이 20대 여성이다. 이 작품의 유려한 그림체, 다채로운 캐릭터, 흡입력 있는 스토리,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 등은 여전히 매력적이므로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팬을 확보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슬램덩크 속에 농구하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여성 독자들에게 모종의 소외감을 안긴다. 알려진 대로 슬램덩크의 여성 캐릭터는 또래 남자 선수가 농구를 시작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거나 매니저로서 팀을 챙기는 등 서포터 역할에만 머문다. 슬램덩크 열풍이 한 시대를 휩쓴 지 거의 30년이 흘렀지만 슬램덩크 이후에 여성 독자들이 환호할 만한, 여성이 주인공인 만화가 있었는가 하면 딱히 떠오르는 작품이 없다.
미국, 유럽의 여성 리그 돌풍…아직은 남의 일
여성은 남성과 비교해서 여러 가지로 불리한 조건 속에서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여성이 주도하는 문화 자본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각종 출판물, 영화, 전시회는 물론 스포츠 경기까지 거의 모든 문화 콘텐츠를 왕성하게 소비하는 성별이 여성인데도 정작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콘텐츠는 손에 꼽힌다.
특히 프로 스포츠가 그렇다. 여성 리그가 남성 리그보다 더 주목받고 흥행에서 좋은 성적은 받는 종목은 배구가 유일하다. 흔히 여성 리그의 흥행 부진을 두고 ‘재미와 박진감이 부족하다’, ‘상품성이 없다’ 등을 원인으로 제시하지만 여성 스포츠 리그를 육성하기 위한 투자다운 투자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2026년 미국에서 여자프로야구리그(WPBL)가 출범한다는 소식은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우선 WPBL의 공동 창립자인 저스틴 시걸의 인생이야말로 그 어떤 인기 만화의 서사보다도 감동적이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최초의 여성 코치인 그는 어렸을 때부터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러 다니며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야구계에 여성이 설 자리가 없어 선수가 되지 못하고 코치가 됐다. 그런 그가 WPBL의 출범을 위해 발 벗고 나섰고 이제 그 옛날 시걸처럼 야구 선수가 꿈인 여성들이 그라운드에 설 수 있게 무대가 만들어지는 중이다.
WPBL 출범의 뒷배경도 흥미롭다. 여자프로야구리그 이전에 여자프로농구와 여자프로축구리그의 성공이 있었다. 미국 내 여자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전폭적인 투자로 이어지는 것이다. 일례로 여자프로농구리그인 WNBA는 올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에 질세라 유럽에서는 여자축구가 인기다. 잉글랜드의 명문 구단인 아스널은 6만 석 규모의 경기장을 여자팀의 홈구장으로 확정했다. 지난 시즌 여자팀 경기가 평균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동원했고 여자축구 리그 최다 관중 기록을 세 차례나 갈아치운 결과다.
스포츠 리그 흥행의 열쇠는 여성
그러나 우리에겐 미국과 유럽의 선례가 그저 부럽기만 한, 먼 나라의 일이다. 특히 야구의 경우 여자 야구는 프로 리그의 출범은커녕 실업 리그조차 운영되지 않는다. 야구 경기를 직관하는 여성 팬이 해마다 꾸준하게 늘어나는데 그들은 같은 여성이 선수로 활약하는 리그를 상상도 하지 못한다.
여성의 자리가 선수와 지도자가 아니라 팬과 치어리더에만 머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은, 한쪽으로 치우친 감각은 그만큼 여성이 주인공으로 노출되는 빈도가 적기 때문이다. 지금 프로 스포츠 리그의 흥행 해법을 고민하는 관계자들에게 ‘여성’이라는 힌트를 주고 싶다. 새로운 스포츠 스타의 활약, 대규모 팬덤의 탄생, 그리고 그에 따른 문화 자본 생성과 같은 스포츠사에 길이 남을 레전드를 써 내려갈 가장 열정적인 심장의 주인은 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