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억과 반성 끌어내는 ‘동두천 성병관리소’ 철거하면 되나요?

철거 기로 놓인 동두천 성병관리소 여성 착취 현장 지우기 비판 이어져

2024-10-25     최형미 전문기자
지난 10월 8일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 주차장에서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옛 성병관리소 입구에 모여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동두천 소요산 자락 미군 기지촌에서 1973년에서 1996년까지 운영됐던 ‘성병관리소’ 건물이 철거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입찰 공고가 난 이후 10월 2일 모 기업이 철거공사 업체로 낙찰됐고 그 기업은 10월 13일 새벽 포크레인을 앞세우고 들이닥쳐 시민들과 몸싸움을 한 끝에 물러났다. 21일에는 성병 관리소 철거 추진 집회를 가졌으며 22일에 200여명이 모여 철거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기지촌 이미지 개선과 시민들의 자부심 회복을 위해 철거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시민단체들은 지난 4월 ‘옛 성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만들고 성병관리소 앞 주차장에 천막과 텐트를 치고 농성을 하며 밤낮으로 돌아가며 지키고 있다. 필자는 급하게 전달되는 소식을 듣고 동두천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눈앞에 플래카드가 보였다. “성병 관리소가 그렇게 좋으면 너의 별장 앞에서 보존하라”. 음식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골목을 지나 촛불 문화제가 열리는 곳에 도착했다.

“옛 성병관리소가 위치한 동두천은 통일과 평화의 도시로 나아가는 것이 살길이다”
‘역사 보존은 미래로 나아가는 길’

벌써 쌀쌀해진 산 아래 주차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가 보내준 떡이며, 커피를 내놓으며 두툼한 외투를 건네주었다.

전 세계 유일한 성병관리소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의 옛 성병관리소 건물. ⓒ연합뉴스

한국 전쟁은 1953년에 끝이 났는데, ‘몽키 하우스’라 불리는 성병관리소는 1970년도에 시작됐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이후 미군 후퇴가 예상될 때 이에 대응하고자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표명하고 ‘미군 복지(?)’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성병관리소다. 오키나와 등 가까운 일본으로 휴양을 떠나는 미군들이 우리나라에서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겠다는 외교적 정책이었다.

우선 기지촌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등록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성병검사를 실시했고 한 달에 한 번씩 애국 교육을 했다. 미군들에게 친절히 하라고 교육했으며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경제 일꾼이며 애국자라는 칭송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병관리소는 여성들에게 악명 높은 곳이었다. 성병검사를 어쩌다 빠뜨려 등록증에 도장이 없어도 잡혀 들어가고, 미군이 성병이 의심된다고 지목해도 가차 없이 잡혀 들어갔다. 군대 막사처럼 만들어진 그곳에 들어가면 싸고 강력한 페니실린을 근육에 투약했다. 여자들은 고통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고 철장에 매달려 먼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왜 몽키 하우스라고 불렸는가’라는 질문에 “원숭이가 죄 없이 철창에 갇혔듯이 우리도 죄가 없는데 잡혀 있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혹자는 필리핀에 주둔했던 미군이 필리핀 여성들을 몽키라고 불렀듯 아시아 여성을 몽키로 불렀던 것에 유래했다는 말도 했다. 애국자라 불리었던 여자들은 국가 권력의 외교, 경제의 도구가 되었지만 막상 국가는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2022년 9월29일 대법원은 “국가의 위법 행위로 인격권 존엄성을 침해당한 이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74명에게 700만원, 43명에게 300만원 지급 판결을 내렸다.

개인 서사로 사라져가는 기지촌 이야기

“헌병이 훈련지역을 지나다가 바위 위에 누워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의 팔다리는 부러져 있었다. 이후 깁스를 한 그녀를 군대로 불러 한 사람 한 사람씩 대면해 범인을 찾아내려 했다.”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군목을 했던 고 선한용 전 감리교 신학대학교 교수의 증언)

사람들은 성매매를 쉽게 돈 버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 국가도 그랬던 것 같다. 군인을 만족시키지 않을 때 나타나는 폭력들을 기록으로 남기기나 했을까? 그저 여자들이 자본 없이 즐기며 외화를 벌어들였다고 생각한 것일까?

동두천에 부임했을 때 밤이 되면 외출하는 미군들을 보고 너무 놀랐다. 군 상부와 상의하고 통금을 9시로 실시하였다. 그 후 나를 찾아온 사람은 그 지역 목사들이었다. 통금이 정해진 이후 헌금이 줄어 교회 운영이 되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선한용 교수 증언)

나라 뿐 아니라 교회도 지역공동체도 기지촌 여성들에 기대어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니 하늘의 위로를 간구했던 그들의 간절한 삶이 엿보인다. 우리 각자는 멀고 가까이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기억을 안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며 사라질 것이고 잊혀질 것이다.

‘역사는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주장이다. 성병관리소를 역사에서 지우고 동두천 이미지를 개선하겠다고 시 당국은 주장한다. 전주의 경우 성매매 집결지였던 선미촌 업소는 폐쇄됐지만 선미촌 아카이브 전시관으로 재탄생했다. 벤치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던 여자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기록했고, 돈 세는 기계, 높은 하이힐까지 전시됐다. 독일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400만명이 학살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배우고 변화하려는 움직임이다. 필자가 200만 양민이 학살된 킬링필드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그들이 갇혀있던 좁은 감옥과 고문도구들이 전시돼 있었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그곳을 방문하고 있었다. 성병관리소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10월 13일 열린 촛불 문화제에서 만신 이지녀가 진오귀굿 형식으로 위령제를 했다. ⓒ옛 성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이지녀 만신, 그리고 진오귀굿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위령제를 진행했던 만신 이지녀는 지난 10월 13일 촛불 문화제를 찾았다. 한 많은 넋들을 위로하기 위해 진오귀굿 형식으로 위령제를 했다. 나물, 생선, 떡시루부터 여러 가지 음식을 직접 만들어 차려놓고 그곳의 혼령을 위로했다. “이곳 이야기를 듣고 준비하며 눈물이 한없이 나왔어요. 그들의 아픔이 전해져 나도 같이 아팠어요.” 만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만신은 어두운 밤 성병관리소 담벼락 아래서 서글픈 넋풀이 타령을 부르며 망자들의 혼을 보살펴 달라고 기원했다. 함께 참여한 우리는 무명천과 삼배 천을 길게 늘여 부여잡고 수왕천 저승길 편하게 가라는 기원을 함께 했다. 이지녀 만신이 꼬앗던 줄을 다시 펴는 과정에서 엉킨 줄이 풀리지 않았다. 한참 여러 가지 시도를 하던 만신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여기 이 여성들이 돈에 한이 맺힌 분들이네요. 천 원짜리든 뭐든 이 꼬인 줄에 꽂아주세요.” 그리고 다시 길을 닦아주는 의식을 진행할 때 엉켰던 줄이 풀어졌다. 우연인지 하늘의 신비인지 알 수 없다. 경제발전의 희생제물이 되었던 기지촌 여성들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흐느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모아진 돈은 아직 할 일 많은 공대위에 전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