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진주 편의점 폭행사건’ 항소심 징역 3년 선고…‘여성혐오 범죄’ 인정
재판부 “피고인 범행, 여성에 대한 혐오·편견에 기반” 여성단체·활동가 “가해자 심신미약 인정 참담하지만… 여성혐오 비난할만한 동기로 짚은 첫 판례 의미”
지난해 11월 경남 진주에서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편의점에서 일하던 일면식도 없던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20대 남성이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5일 창원지방법원 형사1부(이주연 부장판사)는 특수상해 등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한 항소심에서 검사와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과 같은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피해자와 피해자 측 변호사, 여성단체는 징역 3년이라는 판결과 가해자의 심신미약 상태가 인정됐다는 점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1심과 달리 항소심 재판부가 이번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한 언동이나 피해자의 휴대전화기를 전자레인지에 넣어 손괴시키는 범행 수법이 비상식적이라는 점을 심신미약의 근거에 포함시킨 데는 다소 부적절한 면이 있다”면서도 “그것만으로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고 볼 수 없다. 모든 증거를 종합해 봐도 검사가 심신미약 사유의 부존재를 증명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를 폭행하면서 ‘페미니스트니까 맞아도 된다’는 말을 반복했고, (또 다른) 피해자가 말리자 ‘같은 남자면서 왜 남자 편을 들지 않느냐. 저 여자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면서 (또 다른) 피해자를 폭행했다”며 “피고인의 범행은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와 편견에 기반한 것으로 비난받을 만한 범행 동기를 갖는다”고 명시했다.
이어 “피고인은 편의점 직원인 피해자를 이유 없이 폭행하고 피해자의 휴대전화기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작동시켰으며, 위력으로 피해자의 편의점 관리 업무를 방해했다”며 “이로 인해 피해자는 치료 후에도 좌측 귀에 난청, 이명의 후유 장애가 남아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고, 현재까지도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한 “피고인은 항소심 변론 종결일까지도 피해자가 먼저 남성혐오 발언을 하면서 시비를 걸고 자신의 뺨을 때렸다고 전혀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다”며 “그것이 정신병적 증상에 기한 것이라고 해도 범행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피고인의 범행은 피해자들의 삶에 계속되는 신체적 고통, 경제적 어려움을 준 것임과 동시에 이 사회에서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무너뜨려 극복하기 어려운 정신적 고통을 남겼다”면서도 “모든 양형 조건들을 종합해 보면 원심의 형이 너무 가볍거나 무거워서 부당하다고 인정되지 않는다. 피고인과 검사의 양형 부당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이날 피해자 A씨는 항소심 선고 후 여성신문에 “안타깝지만 집행유예가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며 “여성혐오에 기인한 범죄라는 점, (가해자가) 반성하는지 알 수 없겠다고 (판시) 해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그간 여성혐오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가해자들의 여성혐오적 범행동기가 역으로 심신미약 정황의 근거로 인정되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항소심은 가해자의 심신미약 상태와 여성혐오적 범행동기를 분리, 여성혐오적 범행동기를 심신미약의 정황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 비난할 만한 범행동기로 명시했다는 점에서는 유의미하다는 평가다.
반성폭력 활동가 ‘D’는 여성신문에 이번 판결을 두고 “여성혐오를 비난할 만한 동기로서 명확하게 짚은 최초의 판례”라고 진단했다. 활동가 ‘D’는 “1심 판결문을 살펴보면 여성혐오적인 범행 동기와 수법을 심신미약의 근거로 인정했다. 그런데 2심에서 (여성혐오적 동기를) 심신미약의 근거로 삼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지적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재판부가 심신미약을 인정해 양형에 반영하지만 아무리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범행동기가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에 가반했다고 지적했다”며 “더 나아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안전을 침해 당했다는 사건의 사회적인 의미도 짚어냈다”고 말했다.
이날 항소심 선고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변호를 맡은 이경하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도 “양형적인 차원이나 심신미약이 인정된 부분에 아쉬운 측면이 있다”면서도 “범행 동기가 여성 혐오적이기에 비난 가능성이 높고 죄질이 중하며, 비난할 만한 범행동기로서 양형 차원에서 중한 죄질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 판결을 저희가 이끌어냈다는 점도 어느 정도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며 “사건 초기부터 여성혐오 범죄라는 것을 의제화하는 데 노력해 주신 분들과 연대해 주신 분들, 무엇보다 어려운 싸움에서 끝까지 버티고 싸워주신 피해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고 덧붙였다.
정윤정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 소장은 “씁쓸하다”면서도 “지금까지 여성혐오 범죄를 처벌하는 기준이 없었고, 양형에 적용해달라는 우리의 목소리가 참작된 것 같다. 앞으로 판결에 참조할 만한 사례로 남을 것 같다는 점에서 피해자분에게 위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강경민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 대표는 “(가해자의) 심신미약이 인정 안 됐으면 했는데 인정됐다. 여성혐오가 명시된 것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것이 속상하다”며 “앞으로 심신미약이 이런 식으로 인정되는 사례가 없어지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정재흔 여성의당 경남도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여성혐오가 비난 동기 범죄로 인정받은 첫 판례”라며 “분하지만 끝까지 해나갈 것이다. 순천 테러 범죄까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계속 다치고 죽고 있는가. 여성 테러범죄를 가시화하고 입법해 나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이날 오늘 경남여성회와 여성의당, 경남여성단체연합,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 경상도비혼공동체WITH, 여성주의 팀 화로 등 32개의 여성단체들은 판결에 앞서 이번 사건을 규탄하는 기자회견과 집회를 개최했다. 50여명의 집회 참석자들은 정부가 여성혐오 범죄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외치며 집회 후 법원까지 약 400m를 행진했다.
이들은 “2018년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제정됐으나 성범죄, 성매매, 가정폭력처럼 개별 법률로 포섭되지 않은 유형의 여성혐오 범죄는 여성폭력 범주의 사각지대에 있어 피해자 지원과 보호가 입법 공백 상태”라며 “개별 법률로 포섭되지 않는 유형의 여성혐오 범죄는 일반 폭력 범죄 등으로 다뤄질 뿐 여성폭력 통계 구축과 연구, 여성폭력 예방 정책에서 누락되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