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법 강좌] 박정희 통치 시대의 젠더법(2)

1970년대의 동향 2부 한국젠더법제사

2024-08-15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 명예교수

법에 따라 국가와 사회조직이 운영되고 인간관계가 규율되는 법치국가에서 법령과 그에 따른 판례의 형성과 변화는 성별에 따른 사회적 지위와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여성신문은 법을 여성과 젠더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성평등의 실현을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젠더법 강좌]를 연재한다. 1부는 법과 젠더 및 성평등의 관계, 2부는 한국젠더법제사, 3부는 젠더법의 현황, 4부는 젠더판례를 주제로 한다. [편집자 주]

 1971년 7월1일 제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사를 낭독하고 있다. ⓒ대통령 기록관

1970년대의 시대별 특성

국제적으로 1970년대는 성평등이 전 세계적으로 촉진되는 계기가 마련된 중요한 때이다. UN은 1975년을 ‘세계여성의 해’로 선포하고 제1차 세계여성대회를 개최하여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강령을 마련했다. 그리고 1976년과 1985년 사이를 ‘여성발전 10년’으로 선정했고, 1979년 12월에 ‘여성차별철폐협약’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많은 국가에서 여성차별 철폐, 여성발전, 성평등을 이루기 위한 법과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한 제왕적 대통령제로 통치한 때다. 동시에 민주화와 사회발전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사회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이 연대하여 저항하던 때이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차별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고 이화여대는 1977년에 ‘여성학강좌’를 개설했다. 이러한 1970년대에 젠더법은 어땠을까?

성별분업관과 특질론에 기반한 남녀차등 입법

1970년대에는 성별에 따라 기질과 능력, 역할이 다르다는 인식(젠더)이 강해 남녀를 다르게 대우하는 입법이 많이 이뤄졌다. 1971년 11월 19일 전부 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은 근로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한 경우에 유족들에게 지급되는 유족보상연금에서 부부를 다르게 대우했다. 처는 남편이 사망하면 무조건 1순위로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반면, 남편은 처가 사망하면 60세 이상이거나 제3급의 장애인이 돼야 수급할 수 있게 규정한 것이다. 또한 이 시행령은 산업재해로 남녀근로자가 얼굴을 다친 경우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도록 규정하고 성기의 장해는 남성에게만 인정됐다.

1973년 3월 30일 제정된 ‘공무원임용시험령’은 공무원을 성별로 분리하여 채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는데 이에 따라 행정기관들은 공무원의 채용에서 여성을 10∼20%로 제한하는 조치를 했다. 1975.12.31 제정된 ‘국군간호사관학교설치법’은 입학 자격을 “미혼녀자”로 제한했다. 이러한 입법은 야성을 가사노동과 돌봄 전담자와 남편의 생계의존자로 보고 여성의 외모를 중요시하며 공직과 행정은 남성의 일이라는 젠더를 반영한 것이다.

1970년대 산아제한 캠페인 포스터 ⓒ보건사회부

임신·출산 통제와 임신중절 허용 입법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면서 인구 증가에 따른 가정과 국가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하고자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했다. 1970년대에는 “아들·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를 표어로 내세우며 교육과 피임, 불임, 임신중절 수술 등을 통해 임신과 출산을 제한하기 위한 가족계획사업이 전개됐다. 1973년 2월 8. 제정된 ‘모자보건법’은 이러한 정책과 사업의 근거법이 됐다. 또한 이 법은 모든 형태의 임신중절을 처벌하던 ‘형법’ 규정의 예외가 되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조항을 뒀다.

“본인 또는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거나 전염성질환이 있는 경우, 본인이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거나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임신중절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수술은 임신한 날부터 28주 내로 제한했다.

가족법의 미봉적·한시적 개정

1977년 12월 31일에 가족법 개정운동의 성과로 혼인과 가족생활에 관한 두 가지 입법이 공포됐다. 첫 번째 입법은 ‘가족법’ (‘민법’의 제4편 친족과 제5편 상속)의 개정인데 1979년부터 시행됐다. 이 개정 취지를 법제처는 “녀권의 신장”으로 제시했다. 개정 내용에는 부부의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 분명하지 아니한 재산에 대해 “남편의 특유재산으로 추정한다”라던 규정을 “부부의 공유로 추정한다”로 개정한 것이 있다.

또한 처의 상속분을 다른 공동상속인보다 5할을 많이 주고 미혼인 딸의 상속분을 아들의 2분의 1로 하던 규정을 자녀 균분상속으로 한 개정도 있다. 그러나 호주상속인이 되는 아들(장남)의 상속분을 다른 자녀에 비해 5할을 가산하고, 동일가적 내에 있지 않는 “시집간 딸”의 상속분을 다른 자녀의 상속분의 4분의 1로 하는 규정은 개정하지 않았다.

두 번째 입법은 ‘혼인에 관한 특례법’의 제정이다. 이 법은 ‘가족법’이 “성과 본이 같은 자 사이는 혼인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함에 따라 혼인신고를 못하고 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1978년 1년간 한시적으로 혼인신고를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8촌 이내의 혈족과 그 배우자의 친족관계에 있거나 있었던 때, 직계인척, 남편의 8촌 이내의 인척관계에 있거나 있었던 때는 제외했다.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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