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혁신은 젠더 포용성에서 출발한다
[과학 혁신은 포용으로부터] ① 여성 치매, 남성 2배지만 치료약은 남성에게만 효과 골다공증은 백인여성 기준이라 남성은 진단 지연돼 의생명 보건의료, 인공지능, ICT, 생존환경, 기후변화 다양한 분야에서 젠더 다양성 요구
[편집자주] 7년간 955억 유로(약 138조원)를 지원하는 세계 최대 다자간 연구혁신 프로그램이 있다. ‘호라이즌 유럽’이다. 이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성평등 계획’을 세우고 ‘성별균형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경쟁력 있는 연구결과, 기술 혁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신문은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와 공동기획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일어나는 젠더 혁신의 이점을 총 10회에 거쳐 살펴본다.
여성 치매 환자의 비율은 남성의 2배를 넘나든다.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국 65세 이상 치매환자 가운데 여성 비율은 61.7%다. 남성의 38.3%보다 2배 가까이 높다.
최근 여성 환자 비율이 더 높은 치매 분야에서조차 젠더 격차가 크다는 걸 보여준 사례가 나왔다. 지난 5월 15일,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에 치매 환자의 인지 저하를 늦추는 데 효과적인 것으로 극찬을 받았던 ‘레카네맙’이 남성 환자에게는 효과가 있으나 여성 환자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것이다.
이는 약물의 효능이나 부작용에서 성별 간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보여주는 일화다. 과학적 발견과 젠더 인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사건이기도 했다.
약물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한 성별 불평등은 이미 2000년 전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초 연구부터 임상 실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도 연구의 패러다임은 크게 바뀌지 못했다. 한 예로, 의약품 인허가 과정에서도 성별 특성을 고려해 남녀 환자 모두에게 안전하고 효과적인 치료법이 개발될 수 있도록 규정해야 하지만, 한국에선 아직 관련 규정이 도입되지 못했다.
레카네맙 논란은 과학적 발견에 있어서 비판적 평가와 데이터 투명성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과학 연구는 객관적이고 투명해야 하며, 다양한 시각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비판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또한 성별 특성 요소를 연구개발 전 과정에 반영해야 과학적 발견의 정당성과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재현성을 통해 연구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과학기술 젠더혁신’은 과학기술 연구개발 전 과정에 성과 젠더를 고려하는 혁신 전략이다. 이 전략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혁신 기술을 개발하며, 이를 통해 경제·사회 전반에 지속 가능한 포용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과학기술 분야의 젠더 이슈는 오랫동안 여성과학자의 참여 비율과 리더십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최근엔 성별 특성 반영 연구개발 이슈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연구하고 남성에게 테스트한 기술과 연구 결과는 그 자체에 젠더 편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에서 연구 내용에 성별 특성을 고려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의생명 보건의료뿐 아니라 인공지능 및 정보통신기술(ICT) 융합기술, 생존환경, 기후변화 등 젠더 다양성이 요구되는 분야는 다양하다.
먼저, 의생명 보건의료 분야에선 성별에 따른 약효와 약물 부작용 외에도 진단과 치료법에 성별 특성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심혈관 질환은 오랫동안 남성의 질환으로 인식되어 남성을 대상으로 진단법과 치료법이 개발됐다. 그러나 심혈관 질환의 발생율과 사망율은 남녀가 비슷하다.
여성 심장마비의 경우 남성과는 전형적인 증상이 다르다. 통상 심장마비 신호로 간주되는 가슴통증, 호흡곤란 같은 증상은 남성에게 많고 여성은 메스꺼움, 피로, 호흡곤란 등의 증상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여성의 증상은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로 오진되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 맥킨지가 낸 건강 형평성(Health equity)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이 심장마비 증상으로 응급실에 갔을 때 사망할 가능성이 남성보다 7배나 더 높다.
반대 현상도 나타난다. 골다공증은 건강한 백인 여성 기준이다. 그래서 남성 환자의 경우 진단이 지연된다. 골다공증 환자의 약 30%는 남성이지만, 진단과 치료가 늦어져서 골절 비율은 남성이 더 높다고 알려졌다.
과학적 증거에 따르면 암, 당뇨병, 만성폐쇄성폐질환, 정신건강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성별에 따른 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공지능 및 ICT 융합기술 분야에서도 젠더 특성에 대한 무대응은 기술 격차를 일으키고 있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원(NIST)의 연구에 따르면, 일부 얼굴 인식 알고리즘에서 피부색이 진한 여성의 경우 백인 남성보다 오인율이 50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편향은 △인공지능 개발자의 성별 및 인종 분포가 불균형하고 △훈련 데이터의 성별 및 인종 비율이 불균형하며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을 반영할 수 있는 데이터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을 차별하는 아마존의 채용 알고리즘과 여성의 신용을 낮게 평가하는 애플카드의 신용평가 알고리즘은 알고리즘 편향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챗GPT, 제미나이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LLM)도 훈련 데이터에 존재하는 편견이 반영되어 성별 편견을 나타낼 수 있다.
젠더 다양성과 연관성이 높은 또 하나의 분야가 인간의 생존 환경 연구다. 네덜란드 킹마 교수팀의 2015년 연구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여성은 섭씨 24도(°C),남성은 섭씨 19~20도를 가장 쾌적한 온도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남녀의 신진대사 차이 때문이다.
미세 먼지, 미세 플라스틱, 인공조명, 화학물질 등 환경오염이 남녀에 미치는 영향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으나 아직 초기 단계다. 남녀 모두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위해선 지속적인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기후변화는 생물 다양성과 젠더 불평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문제다. 유엔 여성기구(UN Women) 보고서에 따르면, 가족 및 지역 사회 돌봄 책임과 같은 성 역할의 차이로 인해 여성이 기후 재해로 인해 직면하는 어려움은 남성보다 더 크다.
생물다양성 분야 역시 연구에 젠더 관점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일례로 거북이알의 99%가 암컷이 된 사례가 보고된 적 있다. 기후에 따라 성 결정 및 성별 생존율에 영향을 받는 동물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상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젠더혁신은 단순히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포함해 지구 생명체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전략이다. 젠더 혁신은 과학기술 연구개발 분야에서 성 불평등을 줄일 뿐 아니라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해 모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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