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칼럼] '20억 + 1조3808억원’ 살아남을까
재판부, "혼인관계 존중했다면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 형사재판 같은 재판장 질책이 가사사건에서 나와 부정행위 시점, 2008년으로 판단 세기의 이혼에 걸맞는 ‘세기의 재판’
“이 기재 내용은 혼인관계의 유지·존속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만약 원고가 피고와의 혼인 관계를 존중했다면 도저히 이럴 수가 없다”.
지난 5월30일 서울고등법원 가사2부의 노소영·최태원 이혼소송 항소심‘23르20051’선고 재판에서 김시철 재판장은 원고인 최태원 회장을 여러 차례 강도높게 꾸짖었다. 형사재판 피의자에게나 할법한 재판장의 질책이 가사사건에서 터져 나온 것은 사뭇 이례적이다.
사실 항소심은 시작부터가 이례적이었다. “판결문이 길어서 요지 먼저 설명하고 주문 읽겠다”며 선고 재판을 시작한 재판장은 주문을 읽기까지 무려 50분이 걸렸다. 일반국민이 판결문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3인 재판부(김시철·김옥곤·이동현 부장판사)가 왜 이런 결론을 냈는지를 언론을 통해 충분히 설명하고 싶었던 것으로 짐작된다(항소심은 비공개로 진행되었지만 선고재판만은 서울고법의 다른 공간에서 실시간 영상으로 기자들에게 공개되었다).
그 결론은 서초동 법조계가 술렁이고 SK그룹이 발칵 뒤집힐 정도였다. “원고(최태원)는 피고(노소영)에게 위자료 20억원, 재산분할금 1조3808억1700만원을 지급하라”. 실시간 방송을 보면서 탄성을 지른 나 같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2022년 12월6일 1심 재판부의 “위자료 1억원과 재산분할금 665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보다 위자료는 꼭 20배 높아졌고, 재산분할금은 20배도 넘게 뛰었다. 위자료도 재산분할금도 그야말로 역대급이다. 세기의 이혼에 걸맞는 ‘세기의 재판’이라고나 할까.
재판장이 설시(說示)에서 ‘1심에서 위자료는 지나치게 낮아 증액하고, 재산분할은 지나치게 좁게 잡아 확대한다’는 기본입장을 밝히면서 상향 조정은 예견되었지만 20배나 뛸 것을 예상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놀라웠는데 특히 위법 행위로 발생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금인 위자료 액수는 고무적이다. (이와 관련해 기성 법조단체가 침묵하는 사이 청년 변호사 모임이 5월 31일 환영 성명서를 낸 것은 반갑고도 뜻깊다. 새로운미래를위한청년변호사모임(새변)은 “헌법이 보호하고 있는 ‘혼인과 가족생활의 유지’‘일부일처제도’의 가치를 옹호하고 유책 배우자의 위자료를 높게 산정한 판결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위자료는 재판부의 질책에서 드러나듯이 징벌적 성격도 있어 보인다. 산정 사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재판부는 먼저 혼인파탄의 유책배우자가 1심과 같이 원고인데, 부정행위 시점을 원고가 시인하는 2009년 5월 초가 아닌 동거인(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이 남편과 이혼한 2008년 11월 이전이라고 봤다. 최 회장이 2013년 노 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내가 김희영에게 (당시 남편과) 이혼하라고 했고, 아이도 낳으라고 했다. 모든 것이 내가 계획하고 시킨 것”이라고 적었다는 것이다.
이 기재 내용을 근거로 재판부는 최 회장이 노 관장과의 혼인 관계를 존중했다면 도저히 이럴 수가 없다는 말로 질타했다. 2009년 노 관장이 암 진단을 받은 것도 유책배우자의 이런 행동에 정신적 고통을 받은 탓으로 풀이했다.
급기야 두 사람의 가정사는 전 국민에게 알려졌다. 제3자의 폭로가 아닌 최 회장 자신이 2015년 12월 한 언론에 자필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노 관장이 얼마나 모멸스럽고 참담했을까”, 당시 생각했었다. 남의 일 같지 않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복기해보면 재판부가 설명한대로 최 회장은 김씨와 관계를 공개한 후 재단 설립과 한남동 주택 등 다양한 경제적 이익을 주고 공식 석상에 대동하는 등 배우자로 대접했다. 노 관장 입장에서는 배우자로서 권리가 침해되었으므로 이런 고의적 유책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받아야 한다.
이 대목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재판장의 꾸짖음이 인상적이다. "원고는 혼인관계가 해소되지 않았는데도 장기간 부정행위를 계속했다. 이런 행위에 대해 소송 과정에서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헌법이 보호하는 혼인의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여성들의 공분을 산 것은 더 있다. 최 회장은 김씨에게는 2백억원 넘게 쓰면서도 노 관장에게는 2019년 2월부터 신용카드를 정지시켰고, 2022년 1심 이후에는 현금생활비 지원도 끊었다. 민법 상 부부의 의무(부양·동거·협조)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아트센터 나비가 입주한 건물에서도 내쫓으려 하고 있다. 헤어지는 마당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유책성을 따지는 위자료와 달리 재산분할액은 혼인기간 중 기여도를 본다. 항소심에서 20배의 드라마틱한 차이를 만든 것은 특유재산으로 본 1심과 달리 SK(주) 주식을 재산분할 대상으로 판단한 것이 결정적이다.
2심 재판부는 SK 주식은 혼인기간 중 취득했고, 1991년경 피고 부친(노태우)이 원고 부친(최종현)에게 준 343억원이 SK 성장에 기여했다고 봤다. 증권사 인수와 이동통신 사업 진출 과정에서도 SK그룹의 보호막과 방패 역할로 무형적 도움을 주었으므로 SK그룹 경영에 노 관장의 기여분이 있다고 봤다.
또한 피고는 가사와 자녀 양육을 전담하면서 원고의 모친 사망 이후에 실질적으로 지위를 잇는 등 대체재와 보완재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두 사람의 전체 순자산을 4조115억원(최 회장 3조9889억원, 노 관장 232억원)으로 보고 분할 비율은 65:35로 정했다.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지급해야 할 1조3808억1700만원은 이런 과정을 통해 나온 액수다.
두 사람은 1988년 결혼했고 2011년 별거했다. 4년여 뒤인 2015년 말 최 회장은 김씨와 혼외자녀의 존재를 알리며 이혼을 예고했다. 최 회장이 이혼 조정 신청을 한 때는 2017년 7월, 조정이 결렬되자 2018년 2월 이혼소송을 냈다. “가정을 지키겠다”고 버티던 노 관장은 2019년 12월 반소로 맞섰다. 노 관장에게 1심은 패배였고 2심은 승리로 여겨질 수 있다.
이제 3심이 남았다. 법조계에서는 가사소송 특성상 파기환송 가능성이 낮지만 파급력이 큰 사안이라 대법원이 법리를 꼼꼼히 따져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최회장 측은 상고를 통해 반드시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벼르고 있기도 하다.
‘2,000,000,000+1,380,817,000,000원’은 살아남을까? 1~2년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종심 시작을 앞둔 시점에서 괜히 뜬끔없는 생각으로 마음이 불편해진다. 어떤 변호사 말씀처럼 최 회장이 소송을 애초에 하지 않았다면? 편지에 쓴대로 노력해 합의 이혼했다면? (“노 관장과의 관계를 잘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노 관장과 아이들이 받았을 상처를 보듬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는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상대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먼저 이혼소송을 제기해 재산분할의 불씨를 스스로 활활 지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