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노동 기여도, 재산분할 시 폭넓게 인정해야

‘이혼 재산분할과 결혼의 가치’ 심포지엄 전문가들, “전업주부도 재산 형성 기여” 법원 판결에 성역할 인식변화 반영 추세 “혼인 중 재산분할제·부부재산약정 활성화 필요”

2024-05-02     이세아 기자
ⓒMohamed Hassan/PxHere

A와 B는 결혼한 지 15년 된 부부다. B의 반복되는 외도로 이혼하게 됐다. A는 전업주부다. 장애아동을 키우다 보니 결혼 2년 만에 일을 관두고 가사·육아에 전념해 왔다. A가 모은 소정의 예금, 그리고 B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회사의 주식 외에 부부가 함께 형성한 공동재산은 없다.

B가 상속받은 주식 가치는 결혼 전보다 약 3배 상승했다. B는 근로·배당 소득세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급여를 매우 적게 유지하고, 배당도 받지 않으면서 법인카드 등을 유용해 생활해 왔다.

재산분할은 어떻게 이뤄질까. 당연히 B의 주식을 A에게 분할해야 할 것 같지만, 주식은 원칙적으로 재산분할 대상이 아닌 부부 중 한 사람에게 속한 재산, ‘특유재산’이다. B가 결혼 전 지분 20%를, 이후 50%를 증여받았기 때문이다. 

A가 전업주부라는 사실은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재판부가 A의 가사노동이 B의 주식 가치 상승 등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A는 B에게 오히려 자신의 예금을 분할해 줘야 한다.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 믿기 어렵지만 이는 실제 이혼소송 사례다. 익명을 요청한 이 사건의 변호사는 “B는 배당이나 근로소득을 늘리지 않고, 자신의 노무를 통한 기업의 가치상승을 기업 내부에 이익잉여금으로 유보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재산분할을 완전히 회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신문과 한국가족법학회가 25일 서울 서초구 더케이호텔서울에서 연 ‘이혼 재산분할과 결혼의 “가치”,상속 재산분할과의 차별을 중심으로,’ 학술 심포지엄에 모인 가족법 전문가들은 현행 재산분할제도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여성신문

이혼 재산분할 소송에서 전업주부의 부부 공동재산 형성 기여도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순수한 가사노동이 주식가치 상승 등에 실질 기여한 바가 없다고 보아 특유재산에서 아예 제외해 버린다면, 한 배우자가 ‘화폐노동’을 제공하는 동안 ‘가사노동’을 제공한 다른 배우자의 기여를 평가절하하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업주부라도 가사노동을 통해 자산의 취득·유지·증식에 기여한 경우, 특유재산도 예외적으로 재산분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도 나왔다. 

한국젠더법학회 이사인 서혜진 더라이트하우스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대법원 판례는 전업주부 여성의 가사노동에 점진적으로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며 “특유재산이라 하더라도 가사노동이 직·간접적으로 재산의 유지에 기여했다면 재산분할의 대상이 된다고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여성신문과 한국가족법학회가 4월25일 서울 서초구 더케이호텔서울에서 연 ‘이혼 재산분할과 결혼의 가치, 상속 재산분할과의 차별을 중심으로’ 학술 심포지엄에서 서 변호사는 “과거 법원이 ‘내조’, ‘내조의 공’, ‘내조에 힘입어’ 등의 언어적 표현으로 여성 배우자의 가사노동의 가치를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 이러한 표현을 판결문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며 “성별과 성역할에 대한 사회의 인식변화가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전업주부의 기여도에 관한 토론은 활발해진 편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그러나 아직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경우들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이혼 재산분할과 사별 상속의 불균형이다. 혼인기간이 길면 공동재산을 부부가 절반씩 나누곤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배우자가 사별하면 다른 배우자가 받는 몫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자녀들과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혼소송 중 남편이 갑자기 죽자 아내가 취득할 수 있었던 재산의 상당 부분의 권리가 소멸된 사례도 있었다. 서 변호사는 “이러한 불균형 해소를 위해 배우자 사망 시에도 이혼과 마찬가지로 재산분할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매우 공감한다”고 말했다.

이런 불합리를 파악하고 정부도 10년 전 개선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2014년 법무부는 ‘민법 상속편 개정특별분과위원회’를 구성, 피상속인이 혼인 중 형성한 재산 중 생존 배우자 선취분(50%)을 우선 공제하고 나머지 재산을 공동상속인과 분배한다는 개정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기업 경영권이 배우자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우려, 공동상속인들 간 법적 분쟁 증가 우려가 제기됐다. 입법예고조차 되지 못하고 논의는 시들었다. 

독일, 스위스, 프랑스에선 이혼뿐 아니라 사별 시에도 재산분할 청구권이 발생한다. 혼인 중 취득한 재산은 명의를 불문하고 부부의 공동재산으로 추정하는 부부공동재산제를 운영하는 국가들이다. 미국도 애리조나, 아이다호, 캘리포니아, 루이지애나, 뉴멕시코, 워싱턴 등 공동재산제를 채택한 주에서는 이혼뿐 아니라 사별 시에도 재산분할을 할 수 있다. 

이에 ‘혼인 중 재산분할 제도화’, ‘부부재산약정’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양현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부부 간 증여가 6억 원 한도 내에서 가능하나 자신의 정당한 몫을 찾는 재산분할과 성질이 다르다”며 “혼인관계 안에서 부부의 노동과 재산의 공정한 기여, 분배를 고려해 재산분할의 시점과 기회를 혼인 중으로 당겨서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혼인을 앞둔 남녀에게 각 개인과 가족의 특성에 맞게 곧 닥칠 부부의 재산관계를 계획·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관건은 “여성의 불리한 처우를 개선해 부부가 재산을 형평에 맞게 축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양 교수는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국가는 노동시간의 조정, 일·가정 양립의 성평등한 배분, 돌봄 노동의 지원 등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이러한 제도들은 부부간의 재산을 형평하게 축적하도록 도모함으로써 분할할 재산이 별로 없는 ‘형평한’ 가정 경제 상태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