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주 소도시 롱괴유에서 시민 주도로 2008년 개방

여성 일상생활 이루는 부엌과 집안 곳곳 보여주되

사적·공적 공간 사이 ‘제3의 공간’에 존재하는 여성 그려

 

17세기 프랑스 국왕 지원 받아 캐나다로 이주한 ‘왕의 딸들’

이주민 여성들의 기억 안고 있는 길 위의 박물관

 

초기 식민지 시대 퀘벡여성들의 의복을 재현했다. 뒤편으로 세탁실이 전시돼 있다. ⓒ기계형
초기 식민지 시대 퀘벡여성들의 의복을 재현했다. 뒤편으로 세탁실이 전시돼 있다. ⓒ기계형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 머무르며 역사박물관과 국립미술관 등을 살펴보고 그 거대한 위용에 완전히 압도당한 후 조용한 소도시 롱괴유로 이동하는 것은 매우 각별한 경험이다. 캐나다 중심에서 변두리로 혹은 번화가에서 외곽으로 가는 공간적 이동이라기보다는, 멀리 기원을 향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할 때 느끼는 벅찬 감동 같은 것이 있다.

방갈로 느낌의 열린 박물관

우선 캐나다여성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몬트리올로 옮겨갔다. 촘촘하게 짜인 대중교통이 매우 편하게 운행돼 별도로 차를 빌리지 않았다. 몬트리올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영어로는 세인트로렌스, 프랑스어로는 생 로랭 강을 건너 30∼40분 정도 가다보면 롱괴유에 도착한다. 퀘벡주에 속하는 이곳은 인구 2만명이 넘는 평화롭고 작은 도시다.

롤랭-테리엔 가 2380번지에 위치하는 여성박물관(Musée de la Femme)은 이 박물관이 내거는 모토에 맞게 지어졌다. 언젠가 사회학자 로렌 울프(Laurent Wolf)도 주장한 모토는 이렇다.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을 박물관(확대하자면 문화의 장소)의 문으로 데려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그 문을 넘기에 앞서 '당신이 그것을 사랑할 이유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관건이다.”

처음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는 언뜻 이 건물이 박물관이 맞나 의아할 정도로 소박하다. 박물관 건물 자체가 일종의 오브제, 마치 방갈로처럼 언제라도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느낌을 주는 박물관이다.

광활한 캐나다 원주민들의 땅에 처음 발을 내딛던 프랑스계 이주민 여성들의 기억을 안고 있는 길 위의 박물관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현재의 사람들이,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이곳에서 새롭게 삶을 개척해야 했던 프랑스계 이주민 여성들의 과거가 재현돼 있다.

캐나다 최초의 여성박물관으로 2007년 시민 주도로 건립된 이곳은 콘텐츠를 갖추고 2008년부터 개방됐다. 여성박물관은 인구 중 80%는 프랑스계가 거주하는 퀘벡주에 위치해 캐나다에서 가장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공간이면서, 여성의 일상생활을 이루는 부엌과 집안 구석구석을 보여주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그 사이의 ‘제3의 공간’에 존재하는 여성들을 그려내고 있다. 이곳은 전통적 박물관이 주는 견고하고 다소 고압적일 수도 있는 경계를 벗어나, 다가가기 쉬운 편안한 박물관이자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열려 있는 박물관이다.

건축상 구조를 보자면 지상과 지하의 상설전시관으로 구성된 단층건물이다. 건물 바깥에 지하 상설전시관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별도의 독립적인 현관이 있고, 1층 현관으로 들어가면 현대의 일반 가정집의 부엌이 재현된 공간에서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지하 상설전시관의 주요 콘텐츠는 1617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캐나다 퀘벡에 살았던 여성들의 일상생활에 맞춰져 있다. 우선적으로 퀘벡에서 ‘그녀들의 역사’를 말하지 않고는 캐나다의 역사를 쓸 수 없다. 그들은 마리 롤레트, ‘왕의 딸들’ 그리고 성녀 마리게리트 부르주아다.

 

캐나다여성박물관 전경. ⓒ기계형
캐나다여성박물관 전경. ⓒ기계형

 

1층 전시관. 캐나다 그리고 퀘벡을 움직여온 역사 속 위대한 여성들의 모자이크. 여성인물을 연구하고 발굴하며, 새롭게 평가하는 작업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기계형
1층 전시관. 캐나다 그리고 퀘벡을 움직여온 역사 속 위대한 여성들의 모자이크. 여성인물을 연구하고 발굴하며, 새롭게 평가하는 작업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기계형

강인한 생명력으로 땅 일구다

상설전시관은 캐나다와 퀘벡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프랑스 여성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지하 상설전시관의 전체 공간은 시기적으로 17~19세기, 20세기 전반, 20세기 후반으로 구성돼 있다. 완전히 생소한 환경에 던져진 여성들의 정착, 고난, 좌절, 적응, 발전, 갈등, 도전의 스토리가 전시된 유물 속에서 재현되며 당시 상황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판넬에 적혀 있어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1534년 프랑스인 항해사 자크 카르티에가 생 로랭 만(灣)에 도착한 후 이곳은 곧 프랑스령 누벨프랑스(Nouvelle France)가 되고, 이 지역과 오대호를 잇는 모피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프랑스 사회에 알려졌다. 1603년 사뮈엘 드 샹플랭은 생 로랭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탐험을 한 이듬해에 북아메리카의 최초의 프랑스 식민지 아카디아(포트-로얄) 건설에 애썼다.

퀘벡에 처음으로 정착한 약제상 루이 에베르는 1606년 샹플랭이 탐험할 때 사촌이자 누벨프랑스 사령관 장 드 피엥쿠르를 수행했다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후 루이 에베르는 1617년 프랑스에 있던 자신의 아내 마리 롤레트와 세 자녀를 데리고 와서 퀘벡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마리 롤레트는 각종 병을 치유하는 루이를 도와 이 지역에서 널리 신망을 얻었는데, 특히 이곳에 원래부터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선주민 인디언들의 교육에 관심이 높았다. 1627년 남편이 사고로 사망하자, 그녀는 2년이 지나 재혼한 후 자녀들을 돌봤다. 그녀의 가족은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퀘벡에 남았으며, 나중에 그녀는 자신의 집을 원주민 소녀들을 위한 교육 장소로 이용하도록 예수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처음에 퀘벡에 도착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한편으로는 1610년 헨리 허드슨의 허드슨만 탐험에 이어 1670년에는 모피 교역을 위해 허드슨스베이 회사가 설립되는 등 이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 가능성이 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능성이 크지는 않았지만 언제라도 선주민들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프랑스 정착민들의 수적 증가가 크지 않았던 상황에서 ‘왕의 딸들’의 이주는 당시의 누벨프랑스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성화가 엘리노어 폴테스큐-브릭데일은 이 흥미로운 역사적 장면을 자신의 예술가적 상상력으로 재현하고 있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19세기 캐나다 여성들의 일상생활과 부엌용 식기들. 상자 안에 양념통이 들어 있다. 왼편에 수호성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어 가톨릭 신앙의 영향을 보여준다. ⓒ기계형
19세기 캐나다 여성들의 일상생활과 부엌용 식기들. 상자 안에 양념통이 들어 있다. 왼편에 수호성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어 가톨릭 신앙의 영향을 보여준다. ⓒ기계형

 

지하 상설전시관 입구.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여성들의 기억을 발굴하고자 하는 사진전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내 이름은 줄리엣 랑글루아입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기계형
지하 상설전시관 입구.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여성들의 기억을 발굴하고자 하는 사진전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내 이름은 줄리엣 랑글루아입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기계형

 

1930년대 캐나다 여성들이 쓰던 미국의 보나미사의 저렴한 비누 제품, 언더우드 스탠다드 타자기, 콜게이트 치약, 테일러 체온계, 여자의 손을 밝게 해준다는 광고의 제르겐스 로션 등이 전시돼 있다. 여성들은 전통적인 어머니의 역할에서 벗어나 간호사, 타자수, 판매원, 공장노동자 등 직업전선에 나섰다. ⓒ기계형
1930년대 캐나다 여성들이 쓰던 미국의 보나미사의 저렴한 비누 제품, 언더우드 스탠다드 타자기, 콜게이트 치약, 테일러 체온계, 여자의 손을 밝게 해준다는 광고의 제르겐스 로션 등이 전시돼 있다. 여성들은 전통적인 어머니의 역할에서 벗어나 간호사, 타자수, 판매원, 공장노동자 등 직업전선에 나섰다. ⓒ기계형

 

캐나다여성박물관 리디에 올가 엔탑 관장(왼쪽에서 둘째)과 자원봉사자들. 상설전, 기획전, 세미나, 토론회, 영화상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 준비와 진행에서 자원봉사자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기계형
캐나다여성박물관 리디에 올가 엔탑 관장(왼쪽에서 둘째)과 자원봉사자들. 상설전, 기획전, 세미나, 토론회, 영화상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 준비와 진행에서 자원봉사자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기계형

여성의 연대, 박물관에서 꽃피다

프랑스인들의 식민지 건설에서 ‘왕의 딸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여성들의 활약을 설명해보자. 상설전시회는 두 개의 이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이곳에 온 여성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왕의 딸들의 경로’다.

‘왕의 딸들’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식민지 누벨프랑스에 가톨릭 신앙을 전파한 마르게리트 부르주아다. 그녀는 20세기 말에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는데, 상설전시회 공간 곳곳에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 있어 퀘벡과 그녀를 떼어놓고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초창기에 그녀는 몬트리올에 노틀담수녀회를 건립했으며 세상을 뜨기 전까지 빈민 소녀들과 캐나다 선주민들의 교육에 힘썼다. 그녀는 새로운 땅에 도착한 이주여성들을 ‘왕의 딸들’이라 이름붙이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뿌리내리도록 고무시키는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의 딸들’은 1663년부터 1673년까지 프랑스 국왕이 직접 비용과 지참금을 대고 캐나다로 이주한 여성들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는 그 이전과 이후에 스스로 비용을 들여 자발적으로 이주해온 여성들과는 구별됐다. ‘왕의 딸들’은 남성들로만 이뤄진 식민지를 새롭게 개척하기 위해 이뤄진 일종의 이주정책으로, 이를 통해 10년 동안 이주한 여성들은 770명에서 850명에 이르렀다. 주로 미혼여성이나 과부들로 구성된 그들은 이곳에서 비교적 신속하게 남편을 찾아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대부분 파리, 노르망디, 그리고 프랑스 중서부 지역의 빈민 출신이었던 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빠르게 적응했는데 이곳은 신선한 물고기와 고기 등 먹을 것이 풍부해 여성들은 영양 상태가 좋았으며 당시 프랑스 본토보다 30%정도 더 많이 자녀를 낳았다. 이 지역의 인구 증가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누벨프랑스 인구는 1663년 3200명에서 1672년 6700명으로 늘었다. 개척지가 부여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자녀양육과 살림을 하는 것 외에 몇몇은 적극적으로 모피무역 사업에 참여했으며, 상인이나 서기인 아버지나 남편을 도와 집에서 일을 했다.

캐나다는 오랜 세월 이 땅에서 뿌리내려온 소수의 원주민들을 비롯해 역사적으로 다수의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면서, 퀘벡에서 보듯 독특한 지방주의가 살아 있는 곳이다. 우리는 초기 식민시대의 누벨프랑스를 거쳐 영국 통치의 시대(1763∼1849) 그리고 그 이후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캐나다인들의 영국에 맞선 수많은 저항, 아울러 다양한 자치운동과 연합운동에 대해 알고 있다. 1867년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퀘벡, 온타리오를 통합한 캐나다연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는 가운데 1982년 영국과의 법적 유대를 종식시킨 새로운 캐나다법 제정 그리고 이곳 퀘벡에서 일어난 분리주의 운동 등은 잘 알려져 있다.

여성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간략하게 소개되거나 무시되며, 오히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대응과 반응 등에 강조점이 있다. 중산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캐나다 여성참정권운동은 1918년 선거권을 갖게 됐으며, 1∼2차 페미니즘운동의 자장 안에서 캐나다 여성운동의 토대가 형성됐다. 1980년대 이후 캐나다여성들의 핵심 현안은 젠더, 계급, 연령 등을 가로지르며 매우 다양해졌으며, 젠더의 차이뿐 아니라 여성들 간 차이의 문제도 현격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캐나다 여성사가 루스 로우치 피어슨이 1990년 한 논문에서 말했듯 캐나다 여성들이 처한 모순적이며 역설적인 ‘경험, 차이, 우위’ 등에 대한 성찰과 ‘여성의 목소리’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여전히 최고의 답인 것 같다.

캐나다여성박물관의 리디에 올가 엔탑 관장이 보기에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지 못하며, 여전히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여성들이 “모든 여성의 역사, 개인의 역사, 국가의 역사” 사이를 “가로지르며 연대”할 때, 평등한 세상을 앞당길 수 있다는 그녀의 말처럼 퀘벡의 지역사회 안에서 지금 여성박물관이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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