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아동성폭력 자전적 이야기

글그림책으로 펴낸 노유다 작가

“지혜로운 할머니 코끼리 되고 싶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분들

“코끼리처럼 굳건하게 걸어 나가길”

 

노유다 작가는 “코끼리 가면은 피해자로 나를 드러내기 싫었던 시절에 썼던 가면이었다”고 말했다. ⓒ움직씨
노유다 작가는 “코끼리 가면은 피해자로 나를 드러내기 싫었던 시절에 썼던 가면이었다”고 말했다. ⓒ움직씨

“나는 다시 태어나면 사람 말고 코끼리가 되고 싶어.”

작품 속 화자인 혜경은 담담하지만 깊다란 열망을 갖고 말한다. 『코끼리 가면』은 가족 내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자 여성 성소수자(퀴어)인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글그림책이다. 책에는 먹먹한 안개가 짙게 깔려 있지만 희망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한다. 그리고 가해자들을 향해 똑바로 말한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앞으로 더 안녕히 살아갈 것이다.”

책의 저자이자 독립출판사 ‘움직씨’의 공동대표인 노유다 작가를 만났다. 노 작가는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시와 소설을 전공했고 졸업 후 10여 년간 대필 작가, 대안학교 글쓰기 교사, 그림책 교육기관 강사를 거쳤다. 『코끼리 가면』은 그의 데뷔작이자 출판사 움직씨가 내놓은 첫 작품이다. ‘201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공감 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아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성폭력 생존자들로부터 ‘위로가 되는 책’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코끼리 가면』은 친족·아동 성폭력을 다룬 기록 문학이자 다큐멘터리 소설로 잔인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형식은 예술적이다. 치밀한 고민이 엿보이는 글과 함께 그림들은 하나의 예술작품을 연상시킨다.

소설 속 ‘나’는 일곱 살 때부터 가해자인 두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다. 피해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여섯 살, 두 살 터울의 가해자들은 밤낮으로 ‘나’의 몸과 성기를 만지거나 부모가 집을 비울 때 안방으로 유인해 성폭력을 가했다. 친오빠들에 의한 친족 성폭력은 ‘나’의 성장 과정에서 지속됐다.

‘나’는 십여 년이 흐른 뒤에야 부모에게 피해 경험을 털어놓지만 엄마는 “세상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될 더러운 이야기. 가시나가 오빠 기죽이면 못쓴다”고 말하며 두 아들을 두둔한다. 가해자도 자신의 범행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병원 정신과 치료를 마치고 글을 써보겠다는 ‘나’에게 가해자가 한 말은 겨우 “설마 너 오빠가 변태라고 책에 쓰는 건 아니지?”였다.

 

가족 내 성폭력 생존자의 자전 소설이자 여성 퀴어의 삶을 다룬 글그림책 『코끼리 가면』을 쓴 노유다 작가. 그는 이 책을 자신이 공동대표로 있는 독립출판사 움직씨를 통해 지난달 출간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가족 내 성폭력 생존자의 자전 소설이자 여성 퀴어의 삶을 다룬 글그림책 『코끼리 가면』을 쓴 노유다 작가. 그는 이 책을 자신이 공동대표로 있는 독립출판사 움직씨를 통해 지난달 출간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코끼리 가면은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1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침묵을 강요하는 부모와 성폭력 피해 후유증인 양극성 장애에 맞서며 10년 동안 작품을 가다듬었다. “대학 3학년 즈음에 ‘코끼리 가면’의 초고라 할 만한 작품을 썼어요. 배우자이자 유일한 문학 동료인 낮잠에게 제 글을 읽혀보았죠. 그는 제 작품에 대해 격려와 응원의 말을 아끼지 않았고, 함께 글을 다듬고 벼르는 작업을 거쳤어요. 그 과정을 통해 초고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코끼리 가면이 나오게 됐죠.”

노 작가는 “코끼리 가면은 피해자로서 나를 드러내기 싫었던 시절에 썼던 가면이었다”며 “여성이나 소수자가 약한 존재가 아니란 걸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강자가 되고 싶었고, 일부러 더 강한 척을 했다”고 말했다. 책을 쓰고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가면을 벗고 어느 정도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됐다.

소설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면 코끼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코끼리는 작가에게 무슨 의미일까. “다큐멘터리를 보니 코끼리가 전형적인 가모장 사회라고 하더라고요. 길을 가장 잘 찾는 할머니가 우두머리가 되고, 수컷은 열 살 정도가 지나면 알아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요. 그래서 저에겐 코끼리 사회가 하나의 대안적인 풍경으로 다가왔죠.”

작가는 글뿐만 아니라 책 속에 담기는 삽화도 맡아 그렸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고등학교 시절 만화동아리에서 활동했어요. 만화하는 친구들이 해적 동아리처럼 만든 모임이었죠.” 책 속엔 각 장마다 글에 어울리는 그림들이 자리잡고 있다. 노 작가 특유의 그림체와 색감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개성을 만들어낸다. 노 작가는 “나 대표가 그림을 꼭 정해진 형식에 맞춰 그릴 필요는 없다고 말해줬다”며 “‘본능대로 자연스럽게 그려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진정성이 있을 것이고, 표현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느껴질 것’이라는 말을 해줘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책에는 작가의 실제 가족사진도 들어가 있다. 그 의미에 대해 물었다. 노 작가는 “처음에는 가족사진을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런데 초상화는 애정이 있어야 그릴 수 있다”며 “가족은 도저히 못 그리겠더라. 내가 왜 이걸 그려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실제 가족사진을 넣게 됐다.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정말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에요.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보고 ‘이렇게 평범한 가족 내에서도 성폭력이 일어날 수 있구나. 내 주변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노 작가가 그린 자신의 어린시절 모습. ⓒ움직씨
노 작가가 그린 자신의 어린시절 모습. ⓒ움직씨

 

노 작가는 가해자(친오빠)가 놓은 덫에 걸려 봉투 안에서 버둥거리다 죽어간 새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놈은 옷을 벗으면서 책만 다 보면 문을 열어주겠다고 했어. 나는 이불 속에서 버둥거렸지만 이내 힘을 잃어갔어. (…) 나는 봉투 속의 새처럼 너무 쉽게 죽어버렸어”라고 말한다. ⓒ움직씨
노 작가는 가해자(친오빠)가 놓은 덫에 걸려 봉투 안에서 버둥거리다 죽어간 새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놈은 옷을 벗으면서 책만 다 보면 문을 열어주겠다고 했어. 나는 이불 속에서 버둥거렸지만 이내 힘을 잃어갔어. (…) 나는 봉투 속의 새처럼 너무 쉽게 죽어버렸어”라고 말한다. ⓒ움직씨

작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대면하며 싸움을 치르기도 한다. 옆에선 나낮잠 대표가 힘이 돼줬고, ‘나’는 그동안의 고통과 울분을 쏟아낸다. 하지만 돌아온 건 “억울하면 강해지라”는 반응이었고, 엄마는 여전히 “사내아이 기죽이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 때 그 사람들의 밑바닥을 본 기분이었어요. ‘내 가족이었지만 괴물이었구나’라는 생각에 오히려 시원했죠.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니 이제 원 없이 미워하고 싸울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유다 작가는 지난해 1월 동성 반려자인 나낮잠 대표와 함께 출판사를 설립한 뒤 지난달 29일 『코끼리 가면』을 출간했다. 출판사 움직씨는 여성, 성소수자, 여성 퀴어 예술을 다루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글과 그림을 모두 맡았다. 기존에 있던 그래픽 노블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 글과 그림을 비중 있게 다룬 노블 그래픽 형식을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우리말로 풀어 ‘글그림책’이라고 이름 지었다.

“기존의 그림책 방식으론 제 이야기를 충분히 담아낼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우리가 새로운 틀을 만들어보자’ 라는 생각으로 글그림책의 형식을 구축하게 됐죠.”

 

노유다 작가(왼쪽)와 노 작가의 배우자인 나낮잠 대표. ⓒ움직씨
노유다 작가(왼쪽)와 노 작가의 배우자인 나낮잠 대표. ⓒ움직씨

 

합정에 살았던 작가는 작품 속에서 “나는 수년간 합정을 다른 뜻으로 생각해 왔다. 길 잃은 사람들이 걷다가 마주치는, 그러니까 정(情)이 고픈 이가 다른 정과 만나 합(合)을 이루는 곳. 합정이란 동네를 그리 여겨 온 것이다”라고 말한다. ⓒ움직씨
합정에 살았던 작가는 작품 속에서 “나는 수년간 합정을 다른 뜻으로 생각해 왔다. 길 잃은 사람들이 걷다가 마주치는, 그러니까 정(情)이 고픈 이가 다른 정과 만나 합(合)을 이루는 곳. 합정이란 동네를 그리 여겨 온 것이다”라고 말한다. ⓒ움직씨

출판사 이름인 움직씨는 ‘동사’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노 작가는 “우리 출판사가 말글만 앞서는 정체된 곳이기보다는 움직이고 행동하는 곳이 되길 바랐다”며 “광장에 나가서 같이 목소리를 내든, 해시태그 운동에 힘을 보태며 연대를 하든 혐오에 맞서고 위선을 경계하며 행동하자는 뜻에서 ‘움직씨’라고 짓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움직씨에는 완성형의 동사들만 포함된다고 하더라”며 “‘우리가 책을 만들고 펴냈다’라는 완성의 의미도 포괄할 수 있어 움직씨로 짓게 됐다”고 덧붙였다.

노 작가는 10년 전 ‘코끼리 가면’을 책으로 내야겠다는 기획을 할 당시 출판사 설립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문단 내에서 언어 성폭력을 일삼는 사람이 성소수자 관련 책을 발행해 ‘인권 의식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며 회의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출판사를 설립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됐다.

“저희 목소리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출판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발행인이나 편집자, 자본가에 휘둘리지 않고 창작자의 손으로 만들어낸 작품, 원래 의도했던 작품 그대로를 펴내고 싶은 마음이 출판사를 차리게 된 1순위 이유였죠.”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일어난 성폭력 고발 운동에 대해서도 말했다. 노 작가는 “해시태그 하나가 문학으론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대신 해주고 있다”며 “사그라짐의 일로를 밟지 않고 계속해서 서로 연대하며 문제 해결에 힘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로 출판사 움직씨는 트위터 상에서 생존자들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힘을 얻고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피해 생존자들이 코끼리처럼 굳건하게 자기 걸음을 걸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믿고 아끼며 느리더라도 자기 호흡대로 가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러다보면 믿을만한 사람들이 나타날 거고, 할머니 코끼리를 만날 수 있겠죠. 저는 아직 아기 코끼리지만, 나중에 늙게 되면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지표를 알려줄 수 있는 든든한 할머니 코끼리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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