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 대선 승리, 여성들은 어떻게 봤나

“트럼프의 승리가 아니라 차별·혐오 정치의 승리”

이나영 교수 “흑인 남성은 인정해도 여성은 못한다는 백인 남성들의 강건한 연대”

대선 앞둔 한국 여성운동·정치권 전반에 영향 우려도

 

8일(현지 시간) 열린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꺾고 제4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wikipedia
8일(현지 시간) 열린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꺾고 제4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wikipedia

#HateWins(혐오가 이긴다). 8일(이하 현지 시간) 열린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자, SNS상 퍼진 해시태그다. 미국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되리라 점쳐졌던 후보가, 여성혐오와 성소수자·인종차별적 언행을 서슴지 않는 남성 후보에게 패했다. 여성·성소수자들은 충격과 분노, 절망감을 토로했다.

미국에 사는 한인 여성들은 당장 극우세력·인종차별주의자들의 혐오 범죄에 희생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고백했다. “정말로 총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다. 인종적 편견과 여성혐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일이 두렵다.” 뉴욕에 사는 IT 엔지니어 박진(30) 씨가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텍사스주 오스틴에 사는 유학생 이효진(34) 씨도 페이스북에서 “여성혐오자, 성범죄자, 소수자 혐오자인 남성이 대통령인 나라. 문밖을 나서기가 두렵다”고 고백했다.

한국 여성들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아주 ‘즉각적인 공포’를 느낀다.” 여성학자 손희정 씨는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트럼프가 어떻게 ‘소수자’들을 ‘개’ 취급하는지, 그것을 선거 전략으로 삼았는지, 그 ‘혐오’가 심지어 자신도 제어하지 못하는 신체적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트럼프나 미국이 무소불위의 권력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감각되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 전문가들과 여론조사 기관들은 클린턴 후보의 우세를 점쳤다. 개표 전 CNN은 클린턴의 당선 확률을 91%로 예측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숨은 트럼프 지지자(Shy Trump)’의 표가 예상보다 많았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그간 수많은 물의를 빚은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를 꺼렸지만, 그에게 표를 던진 이들이 많았다는 분석이다.

“트럼프의 승리가 아니라, 인종차별, 성차별, 혐오 정치의 승리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페이스북에 “미국에서 여성 참정권 이슈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세네카 폴즈 컨벤션 이후 무려 180년이 지났건만, 백인 남성들의 연대체는 여전히 강건하다. 흑인 남성은 인정하되 여성은 흑백과 무관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저 무의식의 튼튼한 뿌리가 두렵기까지 하다. ‘지나치게’ 똑똑한 여성, 심지어 페미니스트 의식을 갖춘 여성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취급되는 방식을 극명히 보여준다”며 “이는 분명 차기 대선에서 페미니스트 아젠다를 전면화하고자 하는 한국의 여성운동계, 아니 정치권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썼다.

“여성이라서 늘 마주하는 비합리와 혐오와 차별이 힐러리의 삶에서 그대로 보이기에 절망감을 느낀다.” 페미니스트 정당 준비모임 ‘페미당당’의 심미섭 씨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힐러리에 대한 지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전문직업인으로서 퍼스트레이디로서 행정가로서 정치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여성이기 때문에 온갖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잔인한 수모를 당했다. 그리고 지금 더러운 성차별주의자에게 져버렸고. 그냥 진 것도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출구 조사에서는 내놓고 말하기 부끄러워하는 표 때문에 졌다. 그 부끄러운 표에 투영된 악의는 힐러리가 여성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번 패배는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옳은 것을 위해 싸우는 일이 가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9일 뉴욕에서 대선 패배 연설을 통해 “모든 여성, 특히 자신들의 믿음을 제게 보여줬던 젊은 여성들이여. 내겐 당신들의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가장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우리는 가장 높고 단단한 유리천장을 깨진 못했지만, 언젠가 누군가는 깰 것”이라며 “소녀들이여, 여러분은 소중하고 강인한 존재이고, 이 세상의 모든 기회와 행운을 잡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라”고 말했다. ⓒCNN 방송 캡처
“이번 패배는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옳은 것을 위해 싸우는 일이 가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9일 뉴욕에서 대선 패배 연설을 통해 “모든 여성, 특히 자신들의 믿음을 제게 보여줬던 젊은 여성들이여. 내겐 당신들의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가장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우리는 가장 높고 단단한 유리천장을 깨진 못했지만, 언젠가 누군가는 깰 것”이라며 “소녀들이여, 여러분은 소중하고 강인한 존재이고, 이 세상의 모든 기회와 행운을 잡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라”고 말했다. ⓒCNN 방송 캡처

이번 결과는 “더는 혐오를 숨기지 않겠다는 기득권 남성들의 선전포고”라고, 미국 보스턴에 사는 젠더 연구자 앨리스 김 씨는 해석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미국 고학력 기혼 백인 남성 다수가 트럼프를 찍은 것은 주류 남성들이 지닌 비틀린 피해의식의 증거다. 그들의 ‘위대한’ 민주국가에서 여성, LGBT, 흑인, 무슬림, 히스패닉 등 소수자들은 장애물이거나 ‘역차별’ 유발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연도 농담도 아니다. 미국 기득권층은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강자’, 마음껏 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할 수 있는 미래를 선택했다”고 썼다.

여성학자 김홍미리 씨는 페이스북에 “이로써 망했다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며 “민주주의가 상식인 시대에 ‘대놓고’ 혐오와 차별을 공헌하는 트럼프를 ‘대놓고’ 지지하는 일이 부끄러운 사람들은 숨죽이며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고 지금도/여기도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고 썼다. 그는 “우리는 이제 그만 놀라야 한다. 부정하고 부인하면서 설마설마할 때는 지났다. 놀라기보다는 준비하는 게 좋겠다. 붕괴 직전인 멘탈을 붙잡아야 하고 같이 붙들어줄 동지를 기억해내자. 이제 막 막이 올랐을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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