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SNS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씨냉]

메르스 갤러리 접한 뒤

여성혐오·성차별 마주하고

페미니즘 이야기꾼으로

 

페이스북·트위터 팔로워

합쳐 모두 1만4000여명

“통쾌한 작품 ‘사이다’ 같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페미니즘 작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씨냉. ⓒ이정실 사진기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페미니즘 작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씨냉. ⓒ이정실 사진기자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겠어!’라고 작정하고 덤벼든 건 아니었는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페미니즘 작가가 돼 있었어요.”

여성혐오, 코르셋 깨우기, 생리, 노브라 등 다양한 주제로 페미니즘 작품을 그려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씨냉을 만났다. “씨냉은 실명에서 따와 옛날부터 써온 별명이다. 별명을 그대로 예명으로 사용하게 됐다”는 작가는 그때 그때 생각나는 것이나 경험을 엮어 그림과 만화로 풀어낸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을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고 있다. 귀여운 그림에 재치 있는 연출로 답답한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씨냉의 작품은 통쾌함을 선사한다. 그래서 ‘사이다’ 같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듣는다.

예술대학에서 만화를 전공한 작가는 학교를 졸업한 뒤 출판사와 미술학원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일러스트레이터로 길을 굳혔다. 페미니즘 작품을 직접적으로 다루게 된 건 지난해부터다. 작가는 작년에 생긴 ‘메르스 갤러리’ 사이트를 접한 뒤 본인이 가지고 있던 여성혐오와 편견들을 떨칠 수 있게 됐고, 그 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됐다.

 

씨냉 작가 ⓒ이정실 사진기자
씨냉 작가 ⓒ이정실 사진기자

자기억압 벗고 페미니즘 작가로

“처음에 메르스 갤러리를 보고 엄청 충격 받았어요. 거기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그동안 제가 경험했던 자책과 자기혐오·억압, 편견 같은 것들이 다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었죠. 여성혐오와 차별이 뒤엉킨 여성들의 경험들을 읽으며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고 위로받을 수 있었어요. 처음엔 되게 혼란스러웠는데 그 뒤에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어요.”

작가는 “그동안 막연하게 ‘불편하다’ ‘기분 나쁘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성차별이나 여성혐오였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며 “더 이상 예민하다는 취급 받을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닫고 굉장히 후련했다”고 말했다.

“그동안은 차별을 당해도 그게 차별인지 모르고 살았어요. 근데 막연히 기분이 이상하다는 건 알았죠. 그래서 항상 ‘넌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쁘냐’ ‘왜 이렇게 꼬였냐’라는 얘기를 들어왔어요. 근데 메르스 갤러리 이후 기분 나쁨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됐고,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논리를 갖게 됐어요.”

 

‘해방의 눈물’ ⓒ씨냉
‘해방의 눈물’ ⓒ씨냉

메르스 갤러리를 통해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고 해방감을 느낀 작가는 다른 이들도 그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담아 그린 그림이 ‘해방의 눈물’이다. “한 여성이 물속에 잠겨 있는데 물의 수면이 점점 낮아지면서 눈물이 흘러요. 그동안 답답하고 숨 막히는 눈물 속에 갇혀서 울고 있는지도 몰랐던 여성은 눈물 밖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내가 울고 있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죠.”

작가는 메르스 갤러리를 거쳐 페이스북 내에 있는 ‘메갈리아’ 페이지로 넘어가 페미니스트로 활동했다. ‘키배’(키보드 배틀의 준말로 온라인상의 언쟁을 뜻함)를 뜨고 악성 댓글들을 신고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는 와중에 메갈리아3 페이지가 삭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페이지가 계속해서 신고당해 폐지되는 걸 본 작가는 “그 때 너무 화가 나서 무작정 메갈리아 페이지 관리자에게 쪽지를 보냈다”며 “‘제가 할 줄 아는 게 그림밖에 없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그게 인연이 돼서 지난해부터 메갈리아 페이지 관리자와 교류를 하게 됐고, ‘코르셋 깨우기 프로젝트’가 탄생할 수 있었다.

‘메갈’과 손잡고 코르셋 깨우기

코르셋 깨우기는 작가의 대표 작품 중 하나다. 브라질 작가인 캐롤 로제티의 일러스트 작품인 ‘우먼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을 진행했다. 우먼 프로젝트는 작가가 관찰자 시점에서 여성들을 바라보고 여성이 어떤 모습이든, 무엇을 하든 존재 자체로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작품이다.

씨냉은 “원래 캐롤 작가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해 그림만 제가 새로 그리는 식으로 진행하려고 했다”며 “그런데 그 작가가 ‘당신들만의 이야기를 다루면 더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메갈리아4 페이지 관리자가 글을 쓰고, 씨냉 작가가 그림을 그려 코르셋 깨우기 프로젝트가 완성됐다. 코르셋은 최근에 생긴 페미니즘 용어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적 억압과 사회적 시선을 뜻한다.

 

씨냉 작가의 대표 작품  ‘코르셋 깨우기’ ⓒ씨냉
씨냉 작가의 대표 작품 ‘코르셋 깨우기’ ⓒ씨냉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이 뭔지 정확히 알고, 그 욕망대로 행동하면 좋겠어요. 사회가 부여한 ‘코르셋’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라요.”

작가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고통받아온 이들을 위로하는 그림을 그려 감동을 전하기도 한다. ‘물결’이란 작품에서 여성들은 물속에서 나와 서로를 위로하며 따뜻한 연대를 이룬다. 작품을 본 누리꾼들은 ‘감동이다’ ‘눈물 난다’는 반응을 보이며 공감의 목소리를 낸다. 작가는 미러링을 차용한 그림도 그린다. “여자는 꽃. 모든 여자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남성에 대입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남성은 없습니다. 관리 안 한 남성이 있을 뿐”이라고 꼬집는 방식이다.

페미니즘 못 받아들이는 한국사회, “아직 멀었다”

최근 문화예술계에서 벌어진 성폭력 고발 사태와 제2의 김자연 성우 사건이라 불리는 ‘데스티니 차일드’ 일러스트레이터 해고 사건에 대해서도 물었다. 작가는 “‘오타쿠 내 성폭력’ 사건 보면서 많이 괴로웠다”며 “그곳이 저희 업계하고도 연관되기 때문에 제가 과거에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시에는 피해인지도 몰랐던 것을 이제야 피해로 인식하게 됐다”며 “숨어있던 상처가 드러나 아프기도 했지만, 그 존재들이 위로가 됐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줬다”고 덧붙였다.

일러스트레이터가 페미니즘 관련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사건에 대해 작가는 “다른 사람들이 여성혐오 콘텐츠를 생산하거나 ‘여혐’ 발언을 하면 표현의 자유라 말하면서 왜 페미니즘 발언은 표현의 자유로 여기지 않고 바로 해고해버리는지 모르겠다”며 “참 한심하고 졸렬해서 한숨만 나온다. 한국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쯤 작가는 페미니즘 작품을 그리며 힘들었던 점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에 분노했고, 그 분노에 휩싸여서 무작정 뭘 해야겠다는 생각에 페미니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근데 세상이 그렇게 쉽게 변하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지치기도 하고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이러려고 ‘페미’활동 했나 자괴감 들고…. 근데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제 그림 보고 힘을 얻었다는 말을 해줘요. 그래서 다짐했죠. 꼭 세상을 바꾸지 않더라도 한 명의 여성에게라도 응원과 위로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물결’ ⓒ씨냉
‘물결’ ⓒ씨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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