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7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여성, 장애, 법률, 의료, 시민사회단체 등 각계 구성원들이 모여 인공임신중절 처벌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와 형법상의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지난 10월 17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여성, 장애, 법률, 의료, 시민사회단체 등 각계 구성원들이 모여 인공임신중절 처벌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와 형법상의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노래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나는 인생 개망해/덮어놓고 낳다 보면 나는 경력단절녀/몸 상하는 것도 비난받는 것도 모두 나/나도 사람이란다~” 지난달 15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열린 첫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의 풍경이다. 참가자 500여 명은 “My Body My Choice” “여성의 몸에 통제의 마수를 거두라” “나의 자궁은 나의 것” “내 자궁은 공공재가 아니다” 등의 피켓을 들고 종로 일대를 행진했다.

지금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는 ‘임신중절권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검은 시위’ 끝에 낙태전면금지법안 폐기를 이끌어낸 폴란드 여성들, 수년째 임신중절 합법화 요구 캠페인과 시위를 벌이고 있는 아일랜드 여성들, 페미사이드(여성살해·femicide)와 여성혐오를 근절하기 위해 1년 이상 전국적인 시위를 이어가는 아르헨티나 여성들도 최근 한국의 여성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표했다. 

여성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도 인간입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몸과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할 권리, 우리가 원하는 임신과 출산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관련 기사 온라인 댓글란은 이런 문장들로 도배됐다. “피임부터 제대로 했어야지. 애는 무슨 죄냐?” “이 시국에 생명 살상 합법화 시위를 하다니...” “낙태 합법화할 거면 여자의 과거 낙태 기록을 확인할 수 있게 해라. 남자 입장에선 낙태 경험 있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댓글을 보며 지난해 말 ‘미혼모 정부지원 사각지대’ 취재차 만난 여성들을 생각했다. 한 여성은 10대 때 성폭행을 당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임신중절 수술을 받지 못했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가출 후 만난 남자와 동거하면서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고, 스스로 미혼모 시설에 들어간 10대 여성도 있었다. 남자는 책임을 회피했고, 돈이 없어서 산부인과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했다. 임신중절을 고민하는 여자들은 누구나 복잡한 맥락과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을 ‘마음대로 섹스를 즐기면서 애는 낳기 싫은 이기적인 것들’ ‘살인마’로 몰아붙이는 일은 얼마나 손쉬운 폭력인가. 

사회예술가 홍승희 씨는 지난달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임신중절 경험을 밝히면서 이렇게 썼다. “앞으로도 나는 임신을 할 생각이 없다. 모성도 없느냐고? 아니, 사랑하면서 살고 있다. 모성으로 숭고한 어머니가 될 여성이 아니라, 그냥 사랑하며 사는 인간이란 말이다. 대단히 특별한 모성본능, 출산의 기쁨과 숭고함. 사실 이것들은 만들어진 환상이 아닌가. 모성을 인질로 여성에게 출산과 육아, 결혼과 가족, 임신과 낙태수술을 제한하는 문화의 공기가 더 무섭다.” 분노한 여성들은 묻고 있다. 왜 여성은 여성의 몸에 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공포와 수치심에 떨어야 하는지, ‘낙태’는 왜 국가가 규정한 형법상의 죄인지, 왜 남성과 국가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지. “여성은 아이를 낳는 존재이기 전에, 온전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라는 목소리에 모두가 깊이 귀 기울일 때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