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유기농업 40년 김준권·원혜덕 부부

세계 최고 유기농법 인정

‘생명역동농업’ 처음 도입

 

12별자리 따라 씨뿌리고 수확하고

암소뿔에 소똥 채워 만든 증폭제 9가지

 

땅과 작물에 뿌리면

‘오염된 땅’ 생명력 살아나

유기농업은 자연 뿐 아니라 사람도 되살려

 

한국 유기농을 이끌어온 김준권, 원혜덕 부부가 반려견 레오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부부는 농업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농업에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한국 유기농을 이끌어온 김준권, 원혜덕 부부가 반려견 레오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부부는 농업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농업에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경기도 포천까지 버스로 2시간을 꼬박 달려 도착한 포천시외터미널. 그곳에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한탄강을 건너 32km를 달려서야 도착할 수 있는 곳. 포천보다는 강원도 철원에 가까운 이곳에 ‘평화나무농장’이 있었다. 40여년간 자연과 생명을 살리는 유기농업을 실천해온 김준권(68)·원혜덕(60) 부부를 이곳에서 만났다.

정농회와 전국귀농운동본부를 이끌며 한국의 유기농을 일궈온 김 대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유기농법으로 인정받는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agriculture)을 국내에 도입, 확산시킨 주인공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지속가능한 농업의 방향을 제시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헌신적 활동으로 신망받고 있다. 김 대표는 최근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5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촌발전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 대표는 수상 축하의 말에 한사코 “상받을 일이 아닌데 부끄럽다”고 손사레를 치면서도 “이런 계기를 통해 생명역동농업이 알려질 수 있어 기쁘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40년을 한결같이 남편 곁에서 안살림을 도맡은 원씨는 “등잔을 감춰놔도 빛이 나듯 한번도 나서거나 티내지 않고 할 일을 해온 사람”이라며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해온 사람을 인정해줘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의 눈빛에 존경심과 애정이 묻어났다.

원씨는 한국 유기농업의 상징인 풀무원농장의 설립자 고 원경선 원장의 넷째 딸이다. 원씨와 김 대표는 풀무원농장에서 처음 만나 부부의 연까지 맺었다. 18세에 올바른 농업을 배우고자 풀무원농장을 찾았던 김 대표는 평생 생명존중과 나눔의 삶을 실천한 원경선 원장의 뜻을 이어받아 ‘생명 농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시들어 가는 땅 생명력 되살리는 농법

최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먹거리 안전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유기농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유기농 전문 브랜드와 매장이 생기고 관련 상품이 불티나게 팔린다. 유기농 역사가 오래된 유럽과 북미에선 유기농법 중 최고로 생명역동농업을 꼽는다. 1928년 독일의 인지학자인 루돌프 슈타이너가 창시한 생명역동농업은 식물은 땅에서 생명을 얻고, 생명이 깃든 식물 섭취로 사람의 정신질환을 치유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삼는다. 현재 유럽에서는 데메터(Demeter)라는 별도의 인증 프로그램을 두고 있을만큼 전 재배 과정이 엄격히 관리된다. 특히 데메테르 인증을 받은 농산물은 일반 유기농보다 비싼 값에 판매된다.

“정농회에서 일본에서 생명역동농업으로 농사를 짓는 삐리오 드니라는 프랑스인을 초청해 강연을 열었어요. 처음에는 저도 소뿔에 소똥을 넣어 퇴비를 만들고, 별자리도 땅의 생명력에 미친다는 말이 너무 황당하게 느껴졌지요. 하지만 생명역동농업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의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을 읽고 나서, 농법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역동농업은 식물의 생장이 단순히 햇빛이나 물, 온도, 영양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가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태양 뿐만 아니라 달과 12별자리의 움직임까지 살펴서 농사에 적용한다는 얘기다. 같은 철에 재배하는 작물도 뿌리작물이냐 잎작물이냐에 따라 씨를 뿌리는 시기가 엄격히 구분된다. 슈타이너의 이론을 구체화한 마리아 툰 박사가 이를 적용한 ‘파종달력’을 만들었다. 어느 시기에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하고 가공을 할지를 파종달력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김씨도 2008년 독일에서 판권을 얻어 한국어 번역판을 발간하고 있다.

“10월 4일을 보면, 달이 천칭자리에 머물러 있는데 이 천칭자리는 흙의 요소를 땅에 전달해요. 이 때는 당근이나 무 같은 뿌리채소를 심거나 김을 매거나 수확을 하는 날인 거죠. 우리도 해와 달 뿐만 아니라 많은 요소들이 땅과 식물의 생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화학비료 중심의 현대 농업이 발달하면서 이런 요소들이 잊혀졌던 거에요.”

옆에서 원씨도 마리아 툰 박사의 연구 결과물을 보여주며 거들었다. “실험 결과를 보면, 똑같은 적환무(래디시)를 파종달력의 ‘뿌리의 날’과 ‘잎의 날’에 심었더니 결과가 아주 달랐어요. 뿌리의 날에 심은 무는 둥그랗게 튼실한데, 잎의 날에 심은 무는 잎만 자라고 뿌리가 길쭉하죠. 생명역동농업으로 키운 채소의 즙을 내서 특수카메라로 촬영하면, 조직의 모양이 아주 활기차고 또렷해요. 관행 농산물 뿐 아니라 일반 유기 농산물과도 다르지요.”

 

평화나무농장 수수밭에 선 김준권, 원혜덕 부부 ⓒ이정실 사진기자
평화나무농장 수수밭에 선 김준권, 원혜덕 부부 ⓒ이정실 사진기자

쉬운 일 없지만 묵묵히 할 일을 할 뿐

생명역동농업이 유기농과 또 다른 점은 9가지 ‘증폭제’(preparation)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점이다. 영어 그대로 번역하면 예비제지만, 아주 적은 양으로도 넓은 땅의 활력을 불어넣는 다고 해서 증폭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효과는 뛰어나지만 증폭제를 만드는 재료와 방법은 굉장히 낯설고 까다롭다.

“매년 4월과 10월에 농장에 모여 함께 작업을 해요. 500번 증폭제의 경우에는 암소의 뿔에다 암소의 똥을 집어넣고, 겨울 동안 땅에 묻어둬요. 봄에 꺼내 희석시켜 쓰면 되는데 두 손가락 분량의 증폭제로 3000평의 땅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어요. ”

증폭제를 준비하기 위해선 톱풀, 캐머마일, 쐐기풀, 수사슴 방광 등의 재료가 필요한데, 처음에는 유럽에서 들여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검역을 받기 위해 톱풀 몇 뿌리를 구해다 흙을 털어낸 후 국내로 들여와 다시 심어 살려내야 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소똥을 얻기 위해 한우 20여마리도 직접 사육한다. 이렇게 증폭제를 직접 만들어 땅에 뿌리고 또 별자리에 맞는 날을 골라 씨를 뿌리고 수확해야 하다보니 화학비료에 익숙한 국내에선 생명역동농업의 보급이 쉽지 않다.

“2005년 4월 20일 처음 생명역동농법실천연구회를 열어 30명이 모였어요. 그런데 이후에 시간이 흐를수록 모이는 사람들이 줄었어요. 증폭제를 쓰면 화학비료를 쓴 것처럼 눈에 보이는 성과가 바로 나올 꺼라고 기대했던 거죠. 땅에 활력이 생긴다고 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요. 어렵게 시도했는데 바로 이익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보니 유기농업으로 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거죠. 하지만 10년이 흐르고 지난 봄 정기모임에는 100여명이 모였어요.”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도 김 대표는 실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유럽과 미국에서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최고의 가격으로 보상받고 있다는 사실에 뚜렷한 확신을 가졌다. 그는 또 다시 생명역동농업 저변 확대를 위해 묵묵히 할 일을 해나갔다. 연구회 모임을 정기적으로 열고 파종달력을 발간하다보니 이제는 평화나무농장을 찾는 이들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직접 키운 밀로 만든 치아바타를 굽는 김준권 대표. ⓒ이정실 사진기자
직접 키운 밀로 만든 치아바타를 굽는 김준권 대표. ⓒ이정실 사진기자

농장은 손님 끊이지 않는 또 다른 공동체

공동체였던 풀무원농장이 그랬듯 평화나무농장에도 늘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요리연구가 한복선씨가 남편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한씨는 원씨와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맺고 농장 인기상품인 토마토주스를 배달해먹는 단골 손님이다. 원씨가 페이스북에 올리는 농장의 일상을 눈으로 담고 싶어 일부러 시간을 내 찾아왔단다. 전날에는 귀농을 꿈꾸는 부부들이 찾아와 하룻밤을 묵으며 대화를 나눴다. 원씨는 끊임없이 손님이 찾아오는 사랑방 같은 평화나무농장은 또 다른 농촌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저도 풀무원농장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지만 20대에는 공동체에서 살고 싶진 않았어요. 누구보다 마음이 잘 맞았던 남편이 청혼을 했을 때 거절했던 것도 공동체에서 평생을 보내겠다는 남편의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어요. 전 대학을 나와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청혼을 거절한 후 남편 없는 세상은 깜깜하더라고요. 그래서 교사라는 꿈을 이룬 뒤에야 결혼했죠.”

김 대표는 무엇보다 생명역동농업이 오염된 땅 뿐만 아니라 사람을 되살린다고 했다. 나아가 농업은 청년실업, 사회 양극화같은 사회 문제를 풀어내는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유기농은 사람과 토양과 환경에 지속적인 건강성을 유지하는 생산방식이에요. 그런데 지금 농민은 전 국민의 4%, 380만명 뿐이에요. 사회의 뿌리를 이루는 농업과 농촌이 이래서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어요. 뿌리가 썩어가는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가족 중심의 농업이 확산되면 노인 돌봄과 육아가 한번에 해결될 수 있어요. 농업을 통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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