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차별 각성 커져

페미니스트 공개 선언 남성들 급증 “반가운 일”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 성평등이 상식선임을 보여줘”

 

왼쪽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주진오 상명대 교수, 김명인 인하대 교수.
왼쪽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주진오 상명대 교수, 김명인 인하대 교수.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상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는 이른바 남성들의 ‘페밍아웃’(페미니스트+커밍아웃)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나는 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 달기 운동에 많은 남성들이 참여해 적극 페밍아웃을 했고, 올 들어 넥슨이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은 성우를 교체한 사건이 터진 후 마녀사냥이 시작되면서 메갈리아가 격렬한 공격을 당하자 오피니언 리더들을 중심으로 페미니스트 선언이 잇따랐다.

전문가들은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10여년 간 여성혐오 문화가 극성을 부렸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차별을 각성한 남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또 강남역 근처 공중화장실에서 벌어진 ‘5‧17 페미사이드(여성살해)’가 남성들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지적도 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직 대학가에선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남학생들이 수세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성차별에 대해 적극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에서 남성들의 페밍아웃이 갖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최근 수년새 페미니즘 강의를 듣는 남성 수강생은 예전보다 크게 늘었다. 손희정 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은 “페미니즘을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하는 남성들이 많다는 의미”라며 “그냥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적극 동의하고 호응도 크다”고 말했다. 손 연구원은 “페미니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남성 엘리트들이다. 페미니즘이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상식선’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언론고시 준비생 사이에도 페미니즘 강의를 듣고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주목된다”고 덧붙였다.

남성 페미니스트 대표주자로는 우선 성평등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르기 전부터 “양성평등이 한국 정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설파해온 김형준 명지대 교수를 포함해 1995년부터 남자 대학교수 중 유일하게 한국여성사 교양강의를 개발하고 강의해온 주진오 상명대 교수, 인문학 프로젝트 ‘엄마 인문학’을 진행한 김경집 전 가톨릭대 교수, 페미니즘 전도사로 나선 서민 단국대 교수 등을 꼽을 수 있다.

‘메갈 논쟁’ 이후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나도 메갈리안”이라는 칼럼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김명인 인하대 교수도 “근래의 페미사이드(여성살해)라 부를만한 사건들의 연속을 통해, 더 이상 이 억압과 고통을 감내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여성들의 적극적 행동을 통해 내 안의 가부장, 내 안의 남근주의, 내 안의 미소지니(여성혐오)가 새삼 소스라치게 재발견됐다”고 고백했다. 정희준 동아대 교수는 “양성평등은 여성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권력을 거머쥔 남성들이 이뤄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지난 5월 22일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5‧17 페미사이드(여성살해)’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를 추모하는 시민이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 5월 22일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5‧17 페미사이드(여성살해)’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를 추모하는 시민이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해외 리더 중에도 페미니스트 선언을 공개적으로 한 이들이 적지 않다.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지난해 9월 자신의 SNS를 통해 “나는 페미니스트다. 그리고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수차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달초 잡지 ‘글래머’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단순히 대통령일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라며 “성차별이나 성적 고정관념에 대항하는 싸움에 동참하는 것은 남성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남성들의 ‘페밍아웃’은 여성신문과 유엔여성(UNWomen)이 함께하는 글로벌 양성평등 캠페인 ‘히포시’(HeForShe)가 확산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남성이 함께 하는 여성운동’인 히포시 지지를 선언하는 남성들은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김경집 전 교수는 “국제사회에서 성평등은 보편적 가치”라며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으로 통합돼야 한다”고 말했다. 본보에 ‘서민의 페미니즘 혁명’을 연재 중인 서민 교수는 “나는 메갈리아가 생기자마자 열광했던 사람”이라며 “남자, 여자가 함께 잘 살자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학생들에게 여성학을 가르쳐야 우리 사회가 바뀔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성 페미니스트 중에는 가부장제 사회의 권위와 권력에 반대하고, 반권위주의를 실천하려는 의지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경우도 있고,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억압 받아 힘들었다고 여겨온 남성이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로 페미니즘을 찾는 경우도 있다. ‘남성다움’의 신화 속에 갇혀 있는 남성들도 실은 피해자였던 것이다. 남성성이라는 십자가를 벗어버린 이들을 위로하는 페미니즘이 2016년에 새롭게 주목 받는 이유다.

페미니즘은 여성 해방뿐 아니라 다양한 성의 해방을 지향하기 때문에 남성도 충분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물론 남성 페미니스트 중에는 일부 “오빠가 페미니즘을 알려주마”라면서 맨스플레인(mansplain)을 하려는 사람도 있다. 맨스플레인과 페밍아웃의 차이점은 남성들이 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성찰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김 전 교수는 “다만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면 상당히 진보적인양 착각하는 것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페밍아웃이 보혁 갈등처럼 보수와 진보 대결 구도로 가서도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