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찬호 선생 가족 사진 ⓒ국가보훈처
민찬호 선생 가족 사진 ⓒ국가보훈처

8월 15일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아 저명한 참전용사인 김영옥 대령의 부친으로 미주에서 독립운동 자금 지원 등에 힘쓴 김순권 선생 등 235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52명(애국장 58, 애족장 94), 건국포장 26명, 대통령표창 57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지방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이번 포상자 235명 중 국가보훈처가 일제의 수형기록과 정보문서, 신문기사 등 각종 문헌자료를 분석하고 현지조사를 실시해 자체 발굴·포상하게 된 독립유공자는 227명이다.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만649명, 건국포장 1176명, 대통령표창 2739명 등 총 1만4564명에 이른다.

일제의 이른바 ‘호남 대토벌’에 맞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최봉선(崔鳳先) 선생에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08년 음력 2월 의병장 김영백(金永伯)의 부하로 들어가 이듬해 음력 9월까지 동료의병 40여 명과 함께 전남 장성과 전북 정읍·흥덕·고창 등지에서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최봉선 선생은 체포돼 악형 끝에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2년 2개월 만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1910)에서 활동내용을 파악하고, 국가기록원에서 수집한 『합장부(合葬簿)』(전주형무소, 1916)에서 순국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이뤄졌다.

임신한 채 남편의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돕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정수현(鄭壽賢) 선생은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0년 9~10월 경 서울에서 모형 권총 2정을 구입하고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해 대동단 간부로서 당시 전남 광주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분주하던 남편 신덕영(申德永, 1963 건국훈장 독립장)에게 전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매일신보』(1920.12.21) 보도에 따르면 처에게서 모형 권총을 전달받은 신덕영은 이를 동지들에게 전달하였고 동지들은 이 모형권총을 활용해 수백환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데 성공했다. 선생은 일제 당국의 취조 과정에서 임신 6개월인 사실이 알려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징역 8년을 받고 선생과 함께 투옥됐던 남편 신덕영은 1923년 5월 병으로 가출옥한 후 중국으로 탈출해 1930년대 초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미국 하와이에서 한인단체의 임원·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민찬호(閔燦鎬) 선생에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수학했으며, 1905년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했다. 1909년 하와이 합성협회 대표로서 공립협회와의 통합을 주도, 국민회 출범에 기여했고 1910년부터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1918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에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1~1924년 하와이교민단 단장으로 활동했다. 이승만을 도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원장으로서 1923년 5월 남녀 학생 20명으로 구성된 ‘모국방문단’을 이끌고 모국을 방문하여 국내 동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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