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적자·방만경영 대명사에서

전력 분야 세계 1위 올라

‘6개월짜리 사장’ 냉소 잠재운

성과 비결은 ‘SOS 경영’

유리벽 등 여성차별 없애야

 

조환익 한전 사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도록,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전력
조환익 한전 사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도록,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전력

2016년 상반기 한국전력(한전) 사무직 신입 공채 결과, 전체 합격자 20명 중 여성이 15명이었다. 이 소식에 한전 내부에서도 깜짝 놀란 눈치다. 지난해 사무직 여성 합격자가 57%로 절반을 넘긴 적은 있지만 75%라는 수치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한전의 전체 여성 임직원 비중은 20%를 밑돈다. 하지만 신입 채용에서부터 여성 채용이 늘어나면서 대표적인 ‘남초’ 조직으로 꼽히던 한전의 조직 문화에도 변화의 물꼬가 시작되고 있다. 직원 수 2만명의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조환익(67) 한전 사장은 “인재는 기업의 최고 자산”이라는 소신으로 ‘기회 균등’을 강조했다. 2012년 말 취임하자마자 조직을 개편하고 경직된 조직 문화 개선을 강조한 것도 이 같은 철학 때문이다.

“그동안 한전에도 유리벽과 편견이 있었죠. 남성중심 조직 문화로 여성들은 해외 근무를 보내지 않기도 했고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도록,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전 상임이사 7명 중 여성은 아직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민간기업 상무에 해당되는 처장급에 이경숙 조직개발실장이 임명되면서 견고했던 ‘유리천장’에도 서서히 균열이 가고 있다.

성별 다양성은 기업의 성과와 상관 관계가 있다. 최근 맥킨지 컨설팅은 저성장 시대일수록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조직의 건강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성 근로여건이 좋아지고 불합리한 일터 문화가 변해야 생산성이 올라가고 기업의 지속가능성도 담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 면에서 국내 최대 공기업인 한전이 보여주는 의미있는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패전처리 투수에서 구원투수로

한전은 지난 5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2016년 글로벌 2000대 기업’ 순위에서 97위를 차지했다. 한전의 100위 이내 진입은 처음이다. 전력 부문에서는 글로벌 전력회사들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지난해 종합 171위, 전력 부문 4위였던 것과 비교하면 순위가 크게 뛰었다. 매출과 순이익, 시장가치를 종합 평가한 순위에서 전력 부문 1위에 이름을 올렸다는 점은 글로벌 전력 시장에서 한전의 위상과 비전을 말해준다. 조 사장은 모든 공을 전임 사장들과 직원들에게 돌렸다. 그는 “완전히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전임 경영진의 반면교사가 있었고, 턴어라운드(Turn around) 할 시점이었기 때문에 흑자 전환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사실 한전은 몇년 전까지 만년 적자에 시달리며 방만경영의 대명사로 불렸다. 2012년까지 5년간 누적적자만 11조원에 달했다. 2011년 블랙아웃 사태에 송전탑 건설 갈등까지 겹치면서 ‘전력품질 만큼은 최고’라는 자부심에도 금이 간 상태였다. 조 사장은 한전의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2012년 말 사장에 취임했다. 만성 적자와 부채에 허덕이던 공기업을 맡았지만 “길어봐야 6개월 짜리”라는 냉소가 뒤따랐다. 그로부터 3년 뒤 그는 사상 최대의 실적과 함께 돌아왔다. 한전은 지난해 영업이익 11조3467억원, 당기순이익 13조4139억원을 거뒀다.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96.1% 증가했다. 사상 최대 실적이다. 야구로 따지면 그는 패색이 짙은 9회말 2아웃에 등판한 ‘패전처리 투수’였지만, 이제는 역전 승리투수이자 선발투수로 불리며 한전을 이끌고 있다.

그는 최근 한전 사장으로서 패전투수에서 역전 승리투수가 된 경험담을 녹인 『조환익의 전력투구』라는 책을 냈다. 전력난 극복, 밀양 송전선로 건설, 만성적자 탈피, 삼성동 본사 부지 매각 등의 현안을 해결한 과정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독서광’이라는 별명을 가진 조 사장이 책을 펴낸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그는 “컴퓨터로 글을 쓰면 영 글맛이 나지 않는다”며 모든 책을 만년필로 썼다고 했다. 독서광답게 틈 날 때마다 책을 읽는다. 인문학, 소설 등 분야를 따지지 않고 다독한다. 침대에서 책을 읽다가 안경이 찌그러지고 눈이 침침해져도 손에서 책은 놓지 않는단다. 최근 아프리카 출장길에 읽은 책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인 한강의 『채식주의자』다. 그는 책에서 주인공 영혜의 언니 인혜가 ‘언니, 아내, 엄마, 처형, 딸로 ‘복무’해야 했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아프리카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쌍문동 병원에 가는 나도 매사 ‘복무 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작가의 표현이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다.

 

공사 현장을 방문해 점검하는 조환익 사장.
공사 현장을 방문해 점검하는 조환익 사장.

눈높이 소통으로 직원 마음 움직여

독서는 소통의 창구이기도 하다.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어떤 주제가 나와도 대화를 이어나가는 매개체가 된다. 그는 소통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마다 직접 쓴 편지글을 전직원 이메일로 발송해 왔다. 최고경영자(CEO)의 서한이라고 하면 대개 딱딱하고 직원이 대필하면 CEO는 확인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조 사장의 편지는 남다르다. 파격적이라고 할 정도다. 2013년 여름휴가를 앞두고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는 직원들 사이에서 파격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내용은 이렇다. “제 경험상 여름에 휴가 안가고 일 더한다고 실적이 오르는 것이 아니더라. 몇년간 휴가 한번 안 갔다고 자랑하는 간부들이 조금도 존경스럽지 않다. 부하 직원들의 휴가를 잘라먹는 야만적인 짓을 하지 말기 바란다. 3대가 저주받을 겁니다.” ‘휴가 잘라 먹는 상사는 3대가 저주받을 것’이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에 고맙다는 답장이 쏟아졌고 사내 게시판은 직원들의 후기 글로 빼곡했다.

“직원 2만명이 넘는 큰 조직에서 사장과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는데, 이런 편지가 직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글만 봐도 사장이 직접 썼는지 아닌지 금방 알잖아요. 사장이 직접 썼다고 하면 직원들도 호기심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래서 좀 강한 표현이라던지, 쉽고 감성적인 표현을 썼죠.”

조 사장은 휴가는 물론이고 조직 문화도 이런 방식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특히 그가 만들어낸 ‘S.O.S 경영’은 공기업 특유의 경직된 조직문화를 바꾸는 일등공신이다. 유연(Soft), 개방(Open), 신속(Speed)을 강조한 SOS 경영이 의사결정 속도를 높였다고 자신했다.

“과거의 딱딱하고 지루한 의사결정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발전할 수 없어요. 의사결정의 상당수를 위임했고, 전화로도 얼마든지 결정할 수 있도록 문화를 바꾸면서 의사결정 속도가 빨라졌어요. 이제 한전의 의사결정 속도는 사기업보다 빠릅니다.”

조직 혁신과 체질 개선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조 사장은 “조직 스스로 변화와 혁신을 요구할 때가 있다”고 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한테 일어나서 운동해서 치료를 하라고 하는 것은 ‘죽으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아요. 아무리 변화가 필요하더라도 때가 있다는 겁니다. 처음 한전에 왔을 땐 만년 적자에, 전력 수급은 간당간당하고, 현안은 해결된게 없는 상황이였어요. 말 그대로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죠. 그런 상황에서 직원들을 연수원에 몰아넣고 혁신하라고 다그치면 그게 되겠어요? 혁신은커녕 오히려 불신만 생긴죠. 그럴때는 체력이 보강될까지 기다려야 해요. 보약 처분이 필요한 거죠.”

조 사장은 “보약은 소통이고, 소통은 신뢰”라고 강조했다. 당장 흑자를 내라고 하면 부서 간 경쟁으로 남의 실적 뺏기만 늘어날 뿐이라는 판단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없앤 것이 연찬회였다. 뒤이어 아침 조회를 없앴고, 회의도 월요일, 한 시간으로 못박았다. CEO 전용 엘리베이터를 없애 권위적인 분위기도 바꿔 나갔다. 이 같은 변화의 노력은 전력수급 안정이나 전기요금 현실화 등 한전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체력을 키우고 보약을 먹는 준비작업이라는 게 조 사장의 설명이다.

 

에너지 신사업으로 시장 리딩해야

조 사장은 강력한 사업 조정 등 경영 효율화로 한전을 세계 1위의 전력회사로 올려놨지만 1위를 수성하기 위해선 앞으로 ‘에너지 신사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결정된 신기후체제가 에너지 시장의 판도를 흔들고 있어서다.

“파리 기후변화 협약에 따라 우리나라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예상치(BAU) 대비 37%를 감축해야 해요. 통상적인 비즈니스 하면서 이 정도로 감축한다는건 어려운 목표예요. 특단의 조치를 해야 한다는 거죠. 결국 에너지 효율을 통해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한국은 정보통신기술(ICT), 에너지, 배터리 분야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어요. 이 산업을 융복합한게 에너지 신사업입니다. 공기업인 한전이 앞장서서 투자해 미래 먹거리를 찾자는 겁니다.”

이를 위해 조 사장은 최근 스마트그리드, 마이크로그리드, 전기차 충전 인프라, 에너지저장장치(ESS), 신재생에너지 등 한전의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신기후체제의 핵심은 신재생에너지, 에너지 효율 개선, 탄소 포집 등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온실가스를 효과적으로 감축하는데 있다. 한전은 이 중 기여도가 가장 큰 에너지 효율개선에 중점을 두고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스마트그리드를 기반으로 건물에너지관리시스템(BEMS), 공장에너지관리 시스템(FEMS) 성공모델 구축을 통한 건물 내 신재생에너지형 ESS(에너지저장장치) 구축을 추진 중이다. 조 사장은 “저출산·고령화, 주력산업 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한국 경제가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에너지 빅뱅’을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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