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가 된 드라마 ‘시그널’에 나오는 인주고등학교 사건은 2004년 밀양에서 일어난 집단 성폭행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사건의 가해자는 드러난 사람만 41명에 달했는데, 경찰은 이들을 훈방처리했다가 여론이 들끓자 다시 수사하는 등의 촌극을 빚기도 했지만, 그래봤자 실제로 처벌된 학생은 7명에 불과했다.
수사과정에서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부모로부터 합의를 하라는 협박에 시달려야 했고, “이렇게 (신고)해놓고 잘사나 보자. 몸조심해라”라고 말한 부모도 있었다. 또한 피해자의 편이 돼줘야 할 경찰은 그녀들에게 “밀양 물을 다 흐렸다”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은 완전히 잊히지 않았다. ‘시그널’ 이전에도 ‘한공주’라는 영화가 밀양 사건의 피해자를 다루는 등 대중매체에서 사건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어서다. 이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가해자의 친구인 황모 씨라는 건 아이러니하다. 황씨의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다.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은 뒤 황씨가 그 중 한 명의 싸이월드 방명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으니까.
“잘 해결됐나? 듣기로는 3명인가 빼고 다 나오긴 나왔다더만, X도 못생깃다드만 그년들.”
여기에 불을 지핀 건 황씨가 그 뒤 경찰이 됐다는 소식이었다. 황씨가 근무하는 경찰서 자유게시판은 그녀가 그만둬야 한다는 비난성 글로 도배가 되고 있다. 황씨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들이 있고, 그들의 신상이 다 인터넷에 공개된 마당에 철없을 때 가해자 편을 든 사람이 더 큰 비난의 대상이 되는 작금의 현상을 난 이해할 수 없다.
그녀가 경찰이라는 게 그 이유라면, 밀양 물을 다 흐렸다는 막말을 한 경찰에겐 이렇듯 관대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 황씨가 여성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남성인 가해자에게 욕을 했다가는 보복이라도 당할까 두려우니, 좀 더 만만한 여성을 타깃으로 삼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웬만한 범죄는 다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진다. 2015년 9월 천안의 마트 주차장에서 30대 주부가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됐다 살해됐다. 범인 김일곤은 범행 이유를 묻는 질문에 자신과 시비가 붙은 20대 남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진술했는데, 이게 김일곤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여성신문에 따르면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의 비율은 1995년 72.2%에서 2014년 87.2%로 늘어났다.
이건 어디까지나 범죄자의 생각일 뿐, 보통 남자들은 좀 다를까? ‘여성혐오’가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될 정도로 심각해진 걸 보면,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 ‘된장녀’이고, 운전대를 잡으면 ‘김여사’가 되며,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 ‘김치녀’가 되는 사회, 남성들은 만만한 여성들을 욕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심지어 지하철에 탄 할아버지들도 젊은 여자에게만 자리를 양보하라고 호통을 치시니, 이 땅에서 여자로 태어난 걸 원망하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여성을 좀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남성이 바라는 여성의 존경은 강자가 먼저 손을 내밀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