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오래전 공부를 마치고 대기업 연구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일이다. 회사 사장님이 새로 들어온 박사급 연구원들을 환영하는 식사 자리에서 유일한 여성인 나에게 “여박사는 일해 보니 소감이 어떤지”를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제 성(姓)은 강씨인데요”라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순간 배석했던 임원들의 얼굴이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사실 그때 나는 그 의미가 여배우, 여의사를 호칭하는 의미로 표현됐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이 ‘여박사’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그로부터 25년쯤 흘렀다. 최근 새누리당의 여성 국회의원이 20대 총선에 출마하는 여성후보자들에게 “여자가 똑똑하면 밉상이니 약간 모자란 듯 보여라”라고 한 말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일부 여성단체들은 성명서를 내고 항의했지만 발언한 의원의 원래 취지는 잘난 척하거나 오만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 의원이 속한 새누리당이 당명도 여러 번 바뀌었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남성중심적이고 폐쇄적인 조직 문화가 여전하기에 그런 발언이 나온 배경을 당과 연결 짓는 것으로 보인다.
기업이든 정당이든 조직에서 여성이 살아남는 것은 아직도 풀기 어려운 명제임에 틀림없다. 남성주도적 기업 조직에서 정말 능력 있고 일 잘하는 여성이 남성을 아랑곳하지 않고 경쟁의 대상으로 삼을 때 종종 그 여성은 ‘공격적이고 사납고 위협적인 여성’으로 낙인찍혀 중도하차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역량은 좀 떨어져도 주류 남성들에게 잘 협조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여성들이 오히려 오랫동안 살아남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남성들에게도 적용된다. 하지만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고 수적으로 많기 때문에 성질이 고약해도 일 하나로 승부하는 사람, 아첨으로 생존하는 사람 등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 반면 여성의 경우는 주어지는 자리와 기회가 워낙 적다보니 소수의 여성들끼리 경쟁하는 형태가 되고 살아남는 여성의 유형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성편견적 현상이 가부장적 유교 문화를 가진 우리나라뿐 아니라 여권신장이 훨씬 앞서는 미국 같은 나라에도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내년 미국 대통령선거 민주당 후보로 나서고 있는 클린턴 힐러리 전 국무장관의 경우도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비호감 이유는 똑똑한 건 맞지만 너무 잘난 척해서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똑똑한 여자는 이기적’이라는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배려하는 행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소수자로서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여성이 능력이 좋더라도 인상적인 기억을 남기지 못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현역 시절 회의석상에서 여성이 큰 소리로 끼어들기 하면서 발언하는 등 뭔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결국 여성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역량을 강하게 어필하면서도 주변을 배려하는 원숙함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배우는 얼굴이 잘 생겨서가 아니라 연기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배우이고, 가수도 외모나 고정관념이 아닌 진짜 노래 실력이 있을 때 인정받는다. 오죽하면 얼굴에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일까 싶다.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국민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일하는 진짜 여성을 쁩으면 좋겠다. 성격이 좀 강하고 잘난 척 좀 하면 어떠랴. 겉으로만 친절한 가짜보다는 낫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