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내려놓고 홀로서기
클래식발레부터 창작발레까지 스펙트럼 넓혀
“나이만큼 표현력 깊어져” 선택과 집중 필요
‘아티스트 김주원’ 변신 거듭하며 새로운 시도
“러시아로 가지 않을래? 넌 훌륭한 발레리나가 될거야.”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러시아 발레, 그 정수를 배울 기회가 찾아왔을 때 14살 소녀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반년 동안 부모님을 설득했고,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물론 부모님 동의는 없었다. 인재를 알아본 스승의 한마디가 훗날 세계적인 프리마발레리나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수석무용수로 활약한 발레리나 김주원의 이야기다. 그는 2000년 한국발레협회 신인상과 2001년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여자 동상, 2002년 문화관광부 장관상, 2002년 한국발레협회상 프리마 발레리나상, 2004년 문화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으며, 2006년에는 강수진에 이어 동양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최고 여성무용수로 선정됐다.
지난 2012년 15년간 몸담은 국립발레단을 떠난 김주원은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아티스트 김주원’으로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대중적인 행보를 이어간 그는 MBC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댄싱 위드 더 스타’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며 발레 공연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발레리나가 됐다. 올해 마흔인 그는 자신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예술가”라고 표현했다. “여전히 열정으로 가득 찬 플레이어”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은 부드럽게 빛났다.
- 국립발레단과의 인연이 깊다.
“볼쇼이 발레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지만, 발레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국적 때문이었다. 단장이 학교에 와서 다음에 만나자고 악수까지 하고 갔는데 일주일 후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러서는 우시더라. ‘너 국적 때문에 안 돼. 연수단원으로 있으면 정단원 루트를 찾을게’라고 하셨다. ‘난 결국 이방인이었구나’라는 생각에 큰 상처를 받았다. 춤을 안 출 생각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다. 그게 뭐라고. 그때는 그게 전부였나 보다. ‘다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가자’는 생각이었다. 마침 최태지 단장님이 주역으로 오라고 하시면서 인연을 맺은 게 국립발레단이었다.”
- 국립발레단을 떠난 이유는.
“국립발레단을 나온 가장 큰 이유는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라는 수식어 없이 ‘아티스트 김주원’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들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발레단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국립발레단 레퍼토리만 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책임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좀 더 견문을 넓히고 여러 가지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국립발레단은 너무나 훌륭한 울타리였고, 지금은 훨씬 폭넓고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다.”
- 바깥 환경이 낯설지 않았나.
“발레단 밖으로 나와 보니까 많은 사람이 국립발레단에서 뭘 하는지 관심이 없더라. 나는 15년 동안 열심히 춤을 췄는데 아직도 발레라는 예술 장르를 모르는 분이 많더라. 동료들과 우스갯소리로 ‘소외된 장르에서 우리끼리 목숨 걸고 열심히 했나 봐’라는 말도 했다.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뭔가 씁쓸한 느낌이었다. 한편으론 ‘아, 내가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더 많구나’ 싶었다. 발레라는 예술이 주는 힐링과 영감은 크게는 어떤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그 아름다운 발레를 대중에게 더 널리 알릴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 발레의 대중화에 관한 고민인가.
“그렇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를 잃지 않는 것이다. 클래식은 몇백 년 동안 내려왔다. 그 정통성 없이 흐트러진 채로 알리는 것은 옳지 않다. 기본에 가장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발레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음악과 영상, 미디어 등 여러 가지 분야와 융합할 수 있다. 그런 작업을 통해서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라디오 진행도 6개월 정도 했다. 발레리나 김주원을 통해서 발레를 궁금해 할 수도 있으니까.”
-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로 활동 중이다.
“후배들을 위해 노력해야 할 시기에 자연스럽게 학교로 오게 됐다. 학생들은 제자이자 후배들이다. 너무 예쁘고 귀엽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안쓰럽기도 하다. 내 품을 벗어나 학교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갈 길을 생각하면 걱정도 된다. 함께 있는 동안은 내가 겪은 노하우와 경험 등 최대한 많은 것을 주고 싶어서 욕심내고 있다. 또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나 자신을 한 번 더 다잡게 된다.”
마흔, 춤추기 딱 좋은 나이
김주원은 국립발레단 역사상 플레이어로서 가장 오래 활동한 발레리나다. 지도위원 등을 거치지 않고 항상 무대에서 춤추는 무용수였다.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펼친 만큼 그가 발레단을 떠난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왜 하필 지금이냐’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국립발레단을 떠나는 시기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최상의 컨디션일 때여야 한다. 새로운 시도를 하더라도 나에게 아주 자신 있는 상태여야 용기를 낼 수 있고, 힘들게 도전하고 벽에 부딪히더라도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일 때.”
김주원은 발레단을 떠난 이후에도 국립발레단 객원 수석 무용수와 유니버설발레단 상임 수석 무용수 등으로 활동하며 무대를 누볐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는 ‘마그리트와 아르망’ ‘레플리카’ ‘K-Ballet World’ ‘춤이 말하다-크로스컷’ ‘스코틀랜드의 꽃-맥베드’ ‘지젤’ ‘춘향’ ‘칸토앤발레’ 등 다수의 공연에 출연했다.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의 ‘지젤’과 국립발레단 강수진 단장의 ‘까말리아 레이디’, 국립발레단 최태지 명예예술감독의 ‘백조의 호수’를 보면서 자란 김주원은 어느덧 한국 발레계의 정점에 있다. 그의 춤은 올해도 계속된다.
- 주변의 기대가 부담스럽진 않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누군가가 나에 대해 거는 기대나 관심에 부담을 느낀 적은 없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예술가다. 나는 더 노력해야 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나의 예술관은 확립된 게 아니다. 아직도 나는 열정으로 가득 차있다. 누군가 나에게 거는 기대는 그것이 어느 정도 완성돼야 생각할 수 있다. 그저 하고 싶은 작업에 호기심과 열정을 다해 푹 빠져서 살 뿐이다.”
- 삶의 전환기에서 고민도 많았나.
“중학교 2학년 때 러시아로 유학을 갔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바뀐 게 별로 없다. 철이 안 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나는 쉽게 마음이 뜨거워진다. 하고 싶은 작업, 관객과 어떻게 소통할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지 생각하면 심장이 떨리고 두근거리고 너무 행복하다. 그러다 보니 결혼도 안 하고(웃음). 오히려 고민이라면 ‘다음에 이 작업을 언제, 어떻게 할까’ 이런 것들이다. 그리고 나이가 드는 게 너무 좋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지 묻는다면 ‘절대로 아니요’다. 내가 살아온 만큼 열심히 살 자신이 없다.”
- 무용수로서 적은 나이는 아니다
“어느 발레단이나 내 나이는 많은 나이다. 올해 77년생 한국 나이로 마흔인데 정말 적은 나이가 아니다. 어릴 때는 1년에 200회씩 공연했지만, 이제는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시기다. 어떤 작품을 어떤 마음과 어떤 노력으로 담아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선택과 집중에 고심하게 되고 좀 더 신중해진다. 무용수는 그 나이가 가진 표현력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해야 한다.”
-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 많은가.
“상당히 많다. 국립발레단의 역사가 한국발레의 역사라고 본다면 아직 55년이 채 안 됐다. 많은 작품을 가져올 시간이 별로 없었다. 좋은 작품을 한국에 가지고 오기 시작한 것도 길게 보면 10년 정도 됐다. 앞으로는 더 좋은 작품이 들어오고, 한국 창작 공연도 많이 생길 것이다.”
- 공연 일정이 빡빡하다.
“올해는 특히 욕심을 부려서 공연을 많이 하려고 한다. 광주시립발레단과도 공연할 예정이고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도 계획한 일들이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무대는 정말 멋지다. 규모도 아시아에서는 최고다. 공연장이 2~3개 있는데 실험공연이 가능하도록 무대와 객석이 변한다. 서울에서는 뮤지컬 두 편을 올릴 생각이다. 여름에는 뮤지컬 컨택트, 겨울에는 팬텀에 출연한다. 5월쯤에는 예술의전당 기획공연으로 안무가 허용순 선생님을 초청해서 무용수 10명과 신작을 만든다. 현대무용과 발레를 융합한 모던발레 창작공연도 준비 중이다. 지젤과 카르멘도 준비하고 있고. 안무가 이정윤씨와 만드는 한국창작발레도 준비하고 있다. 아, 연말에는 당연히 호두까기인형도 있다.”
자연인 김주원은 ‘조카 바보’
“사진 좀 보시라.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김주원은 조카 바보다. 6살인 조카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예쁘고 귀엽다”고 자랑하는 모습이 재밌다. 한국 발레를 종횡무진 누비던 카리스마는 잠시 접어둔다. “이모, 턱을 더 이렇게 해야 할 거 같아요”라며 발레도 가르쳐준단다. ‘자연인 김주원’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사실 발레를 빼면 쓸데가 없다. 친구들은 ‘넌 정말 짐이다’라고 한다. 사실상 할 줄 아는 게 없다.”
김주원은 요리도 못하고 운전면허도 없다. 도로주행에서 8번 떨어지고 포기했단다. 연습하고 공연할 때 외에는 집에 있다. 독서와 음악 감상이 취미라면 취미다. “공연 보는 거 좋아하긴 하는데 누구나 하는 거니까. 아, 자연인 김주원은 정말 쓸데가 없네.”
- 다이어트는 따로 할 필요가 없겠다.
“다이어트를 해야 했으면 발레를 포기했을 거다.(웃음) 먹거리는 안 가리고 다 잘 먹는다. 어제도 돼지고기 3인분에 밥 2공기를 먹었다. 먹는 만큼 뛰는 것 같다. 단것도 늘 구비해 놓는다. 그런데 이제는 좀 좋은 걸 먹으려고 신경 쓰고 있다. 빨간 살코기도 먹고 채소도 먹고….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그것만 먹고살겠나. 순대도 먹고 삼겹살도 먹어야 한다.”
- 건강은 어떻게 관리하나.
“지난해 말 죽을 만큼 아팠다. 원래 폐가 약하다. 폐 기능이 보통 사람의 반 정도밖에 안 된다. 다행히 춤을 추면서 더 건강해졌지만, 워낙 빡빡하게 살아왔는지 한순간에 몸의 기능이 다 무너지더라. 뚜렷한 병명 없이 폐에 물도 차고 너무 힘들었다.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자율신경계가 많이 무너졌더라. 몸을 많이 쓰는 사람에게 올 수 있는 증상이다. 자율신경계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거다. 하루에 1ℓ 정도 마시던 커피를 끊고 물 2ℓ로 바꿨다. 피부도 좋아지고 몸 상태가 달라졌다. 물은 정말 정말 중요하다.”
- 1남 3녀 중 셋째 딸이다.
“가족들은 항상 나를 걱정한다. 언니, 오빠, 여동생은 다들 결혼해서 애도 있고 행복하게 산다. 부모님은 아직도 아름답게 사신다. 부모님처럼만 살 수 있으면 더 바랄 것도 없는데 아직 결혼보다는 일이 너무 좋아서 다들 걱정한다. ‘쟤는 언제 철이 들려나’ 하고.(웃음) 이런 얘기를 하면 시집가기 더 힘들겠지만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요리도 별로 재미없더라.”
- 손이 많이 가는 딸이다.
“부모님께는 아직 아기다. 부모님 같은 어른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제일 존경하고 닮고 싶은 분이 부모님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누군가에 대해 나쁘게 얘기한 걸 본 적이 없다. 나는 상당히 모나고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라서 부모님 앞에서는 그런 모습이 상당히 부끄럽다. 아버지는 사업하시다가 오빠에게 물려주셨고,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자식들 때문에 그만두시고 평생을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주부로 사셨다. 조카들도 엄마 손이 닿아서 천사 같다.”
- 어떤 무용수로 남고 싶은가.
“춤을 시작한 후부터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수식어는 언제나 똑같다. ‘최고’가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는 발레리나’다. 클래식을 추는 무용수는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작품을 10~20년 동안 계속 춰야 한다. 관객도 매번 똑같은 작품을 본다. ‘더 깊어졌다’ ‘더 좋아졌다’ ‘더 감동적이다’ 이런 평들이 좋다. 18살 어린 발레리나에서 이제 불혹의 발레리나가 됐지만, 아직도 내 춤을 사랑해주는 관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더 많은 언어로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게 변함없는 나의 꿈이다. 그 꿈에 맞게 현실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공연을 보러 오시는 분들에게 변함없이 감동을 주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