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밤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2015년을 보내는 제야의 종 타종 행사를 찾은 시민들이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12월 31일 밤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2015년을 보내는 제야의 종 타종 행사를 찾은 시민들이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얼마 전 제주도에 갔을 때 영화 ‘건축학 개론’의 배경으로 등장한 서귀포 남원읍 ‘서연의 집’을 찾았다. 바다 전망이 좋은 카페 같은 집에서 많은 사람들과 커피 한 잔 하고 나온 것이 전부이지만 필자를 의아하게 한 것은 90년대 대학 시절을 보낸 또래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20대의 청춘만이 북적이고 2012년 방영 이후 영화의 흥행 성적에 비해 이 집의 인기가 생각보다 오래간다는 것이었다.

‘건축학 개론’ 이후 복고 열풍이 식지 않고 있다.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기획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90년대를 상징하는 문화 키워드가 됐다. 영화판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세대의 희생과 헌신을 다룬 영화 ‘국제시장’은 누적 관객 1400만 명을 돌파하며 역대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다. 1970년대 통기타의 멋과 낭만을 다룬 영화 ‘쎄시봉’도 화제가 됐다. ‘응답하라’ 시리즈 등 열거하지 않더라도 문화 전반의 복고 열풍이 해가 거듭될수록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과거’에 포획되어 살아가고 있다.

2000년 1월 1일 0시 21세기의 첫 종소리를 듣기 위해 수많은 인파와 함께 보신각 앞에서 흥분했던 것은 21세기는 우리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가 다시 20세기 과거의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있다.

‘노스탤지어(nostalgia,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라는 개념은 17세기 의학자 요하네스 호퍼가 처음 정립했다. 장기 원정에 시달리는 스위스 용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심신이 허약해지는 상태를 기술하기 위해 창안한 단어다. 사람들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과거를 이야기한다. 현실에 만족하면 더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19세기 심리학자 하스펠(Haspel)은 향수를 ‘현재로부터 과거로의 정신적 도피’로 보았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도 복고 열풍이 있었지만 사회 전체의 핵심 키워드는 복고가 아닌 웰빙이었다. 당시의 복고는 과거 세대가 주도하는 표면적인 유행일 뿐이었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 이후 경제적 황금기가 지나고 일고 있는 최근 몇 년의 복고 열풍은 인간 근원적인 삶의 공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지금보다 더 못살았던 과거보다 더 살기 어려운 현재라는 시대, 우리는 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향수하고, 도피하려 한다. 이것이 과연 맞는 현상인지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 전체의 활력이 떨어져 있다. 경제 동력이 더욱 그러하다. 경제 동력은 사회 개혁에서 나오는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은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일 때 사회 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혁해 3만 달러로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1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넘어가는 데 가장 느린 국가로 꼽힌다. 27년 걸렸는데 달성하지 못했고, 달성해도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른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효율성은 한 세대인 30년 정도이고 그 효율성으로 우린 성장의 시대를 누렸다. 문제는 과거의 효율성에 기대며 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 또한 노스탤지어에 빠져 있다. 과거의 성공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혁신의 딜레마에 빠졌다. 이 딜레마로부터의 탈출구는 자기부정이다. ‘자기 부인(Self-denial)’에서 새로운 혁신이 시작된다. 그걸 통과하면서 진실된 과거와 새로운 미래를 보는 ‘또 하나의 눈’이 생겨난다. 그 눈을 통해 지혜롭고 자유로워진다.

다시 새해다. 외눈박이가 아닌 두 눈으로 정직하게 과거와 대면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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