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랜만에 집에서 가까운 해수사우나에 갔다. 주말에다 단체손님까지 있어 무척 붐볐다. 탕에 들어갔다 나와 몸을 씻으려고 샤워기 앞에 앉았는데 온수가 나오질 않았다. 처음에는 내 자리만 고장인가보다 하고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빈자리가 없었다.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옆에 앉은 아가씨한테서 튄 물이 차가웠다. 그래서 오른쪽에 앉은 아주머니한테 물었다.

“혹시 따뜻한 물 나와요?”

그제야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말했다.

“조금 전부터 안 나오네요.”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목욕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혼잣말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왜 온수가 안 되지? 고장 난 거야?” “앗, 차가워.”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일어서서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탕에만 50명이 넘는 손님들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목욕탕 한쪽에서 마사지를 하고 있는 목욕관리사들에게 가서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분들 역시 샤워기를 틀어놓고 일하고 있었으니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무심히 말했다.

“우리는 몰라요. 밖에 나가서 말씀해보세요.”

물기도 말리지 못한 채 라커실로 나와 책임자를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매점에 있는 분에게 말했더니 자기는 여기 책임자가 아니라고 카운터로 나가서 말하란다. 어이가 없었다.

“제가 이렇게 벗고 나가서 말씀드려요? 전화라도 해주셔야죠. 저 안에 있는 분들이 다 찬물로 씻고 있어요.”

그제야 매점 담당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온수는 목욕을 대충 마치고 나올 때가 돼서야 나왔다.

온수가 끊긴 것은 사고였을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이 사고로 인한 불편함을 그냥 견디고 있었다. 아무도 항의를 하지 않으니 사우나 측에서는 온수가 나오지 않은 20∼30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항의하기 위해 카운터로 갔는데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기다리던 손님들이 계산을 해달라고 소리를 치자 세탁실에 있던 남자 직원이 뛰어나왔다. 당황해서 쩔쩔매는 그분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냥 돌아 나왔다.

그날 나는 사우나 측이 아니라 7000원이란 적지 않은 돈을 내고 들어와서도 찬물로 묵묵히 샤워를 하던 50여 명에게 더 화가 났다. 그들의 대단한 인내심이, 혹은 관대함이, 무관심이 무서웠다. 그들의 침묵과 방임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병들게 한 정치꾼들을 키웠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그 사우나를 이용하는 손님들은 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문득 우리 안에 이미 ‘에이, 괜히 나섰다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참고 말지 뭐’ 하는 무책임과 체념이 깊이 뿌리 내린 것 같아 서글펐다.

400여 년 전 허균은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를 백성이라고 했다. 그는 백성을 항민, 원민, 호민으로 나누고, 하늘이 사목을 세운 이유는 어느 한 사람이 백성 위에 군림하며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골짜기 같은 욕심이나 채우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백성이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려면 자신들이 대리자로 세운 이들의 무능과 악행에 제대로 항의조차 못하고 침묵하는 항민, 원민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주인이 되는 호민으로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지금 호민은커녕 7000원어치 권리조차 정당하게 요구할 줄 모르는 항민이 되어가고 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