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귀국 인사를 하러 온 선명회어린이합창단. ⓒ국가기록원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귀국 인사를 하러 온 선명회어린이합창단. ⓒ국가기록원

 

이명박 정부 당시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내각이란 신조어가 유행했다. 강남의 한 대형교회인 소망교회는 파워 엘리트의 산실로 통했다. 소망교회 설립자는 유엔군 유격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월남한 서북 출신 장로교 목사 곽선희다.

역사학자 윤정란의 역작 『한국전쟁과 기독교』(한울)는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전쟁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톺아보면서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한국전쟁연구국제사업단 연구원으로 있는 윤씨가 5년간의 연구‧집필 작업 끝에 책을 냈다.

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대형 교회의 상당수가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책은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떠오르는 과정부터 박정희 정권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과정까지를 실증적인 필치로 그려낸다.

6공화국이 들어선 후 1년쯤 지나 모 종합일간지는 “비행기를 타려면 ‘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라는 말이 세간에 공공연하게 유행한다고 보도했다. 특정 지역 출신들이 핵심 요직을 장악하고 국정을 운영한다는 내용이다. 언론은 ‘노스웨스트’가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에서 유래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서울에서 결성된 극우 반공단체다. ‘백색테러단’, ‘역겨운 단체’, ‘악의 그림자’로 기억되는 이 단체는 우리 역사에서 악몽 같은 이름이다. 경찰과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좌익 소탕의 전위대로 나선 이들은 제주 4.3사건 당시 무자비한 양민 살상을 주도했다. 윤씨는 “40년 전 해체된 서청의 활동 탓에 서북 출신의 다른 활동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서북 출신들은 군과 언론계, 교육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고 기독교계에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며 “지금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형 교회의 상당수가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선교지 분할 협정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담당했던 황해도 북부와 평안도를 서북 지역으로 본다. 19세기 말 소외된 변방이던 곳이 어떻게 기독교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물결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을까. 윤씨는 “서북 지역은 신흥 상공인들이 성장하고 교육 수준이 높아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평양대부흥운동 등을 거치면서 서북은 기독교 색채가 가장 강한 곳이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광복과 함께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김일성이 뒤따라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소련군 사령부와 김일성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단행해 단 한 달 만에 지주제를 해체했다. 기독교인들은 경제적 기반을 상실했다. 소련군 사령부와 김일성에 반대하던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체포되거나 행방불명됐고, 검거를 피해 남쪽으로 탈출했다. 말 그대로 ‘엑소더스’였다.

 

주한미군 주최로 서울 노량진교회가 운영하는 남북애육원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전쟁고아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국가기록원
주한미군 주최로 서울 노량진교회가 운영하는 남북애육원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전쟁고아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국가기록원

한국전쟁은 ‘신이 주신 기회’

윤씨는 “탄압을 피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구원한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말 그대로 ‘신이 주신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맺어온 관계를 활용해 전쟁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분배하는 권한을 독점해 교계 내부의 주도권 경쟁에서 승리했다. 서북 출신 고 한경직 목사는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영락교회로 결집해 세력화했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경험과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국 기독교계를 이끄는 인물로 떠올랐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전쟁고아는 거리의 부랑아나 범죄 용의자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미국 언론은 전쟁고아를 반공과 한미 혈맹의 상징물로 재발견했다. 미국의 도덕적 가치를 대외적으로 선전할 필요를 느낀 정부와 교세 확장을 노린 복음주의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전쟁고아 사업은 탄생했다. 밥 피어스가 월드비전을 창설했고, 뒤이어 홀트 부부도 전쟁고아 입양에 나섰다. 한 목사는 월드비전과 손을 잡고 한국선명회를 통해 전쟁고아 사업에 참여해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면서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반공주의는 한국 기독교를 규정하는 이념이다.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태생적으로 강력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1950년대 반공을 대표하는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이승만이 휴전회담을 촉구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용공 단체라며 공격하자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던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긴밀한 관계였던 WCC의 뜻에 반해 이승만을 지지하고 휴전에 반대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핍박으로 해산당한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경직 목사도 자신의 인맥과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승인을 받도록 지원했다.

 

아메리칸 릴리프 퍼 코리아(ARK)가 1953년 옷 수집 캠페인을 위해 만든 포스터를 들고 있는 그레이스 김(오른쪽)-존 김 남매. ARK는 전쟁 구호민을 위한 이 캠페인을 위해 포스터 2만5000개를 제작했다. ‘뉴욕 타임스’ 53년 3월17일치에 실린 사진. ⓒ뉴욕타임스
아메리칸 릴리프 퍼 코리아(ARK)가 1953년 옷 수집 캠페인을 위해 만든 포스터를 들고 있는 그레이스 김(오른쪽)-존 김 남매. ARK는 전쟁 구호민을 위한 이 캠페인을 위해 포스터 2만5000개를 제작했다. ‘뉴욕 타임스’ 53년 3월17일치에 실린 사진. ⓒ뉴욕타임스

경제 성장의 이론적 토대인 승공 담론 

한국 기독교가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을 연달아 지지한 배경에는 승공 담론이 있었다. 승공 담론이 한국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배경이 된 것이다.

승공 담론이란 군사력으로 북한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전투적 반공주의 대신 체제 경쟁을 통해 공산주의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북한이 전후 재건에 성공하자 위기감을 느낀 한국 기독교가 내놓은 승공 담론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끌어낸 이론적 근거가 됐다.

승공 담론은 군사정권 지지자들에 의해 홍보됐다.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던 유봉영은 승공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인데 이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토대가 없이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유보한 채 경제 성장부터 먼저 달성해야 한다는 논리로 전개됐다.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부패 대신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천하고 사회적 빈곤을 없애는 것만이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진정한 반공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반공의 재정의는 박정희 정권과 결합할 수 있는 중요한 사상적 명분이 됐다.

한국 기독교는 생명 윤리를 중요시해야 하는데도 천주교와 달리 가족계획 사업을 적극 지지하며 성서를 새롭게 해석해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박정희 정권은 가족계획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면 공산당보다 잘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런 주장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준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 과정을 통해 기득권 세력으로 점차 자리를 굳혔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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