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독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는 자기 유지, 자기 재생산도 버거운데 정책은 저출산, 세대 재생산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 사거리 인근에서 직장인들이 출근길을 재촉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일중독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는 자기 유지, 자기 재생산도 버거운데 정책은 저출산, 세대 재생산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 사거리 인근에서 직장인들이 출근길을 재촉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바쁘시죠?” 요즘에 흔히 나누는 인사다. 저마다 “바쁘다”고들 하니 그 사정을 알아주는 것이 인사가 되었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정말 바쁘다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이라도 하려 하면 다 들어줄 수가 없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이 나 역시 바쁘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소설 『행복한 죽음』에서 돈이 있으면 시간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바쁜 건 돈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제 불안은 실업률 증가나 비정규직 확산과 연관돼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다는데 다들 바쁘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인 걸까? 그렇지 않다. 일자리 구하기 어려운 현실이 우리를 더 바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건 하게 되면 성과를 많이 내야 자리를 보전하거나 정규직 직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한 복지체제하에서는 노동을 해도 미래는 불안하다. 벌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노동시간을 늘려야 한다. 노동에 관한 우리의 정서와 문화도 질보다는 양 중심의 성과주의, 과도한 경쟁체제 등 근대 성장과 개발에 대한 신봉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이러한 노동문화 속에서는 일중독은 정상적이다 못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다. 웹툰 ‘미생’ 오 과장의 충혈된 눈은 과로체제를 고발하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그가 성실한, 곧 올바른 일꾼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중심성과 성과주의에 대한 비판은 계속 있어 왔지만, 평가 체계가 변하지 않는 한 행동양식이 바뀌기는 어렵다.

비정규직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사다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상사의 눈에 잘 들기 위해 일해야 한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정규직 직원의 승진을 위해 몸바쳐 일하는 상황이 왕왕 빚어진다. 사용되다 버려질 수도 있다는 불안과 안정된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 사이에서 어느 것에 마음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을 흔히 ‘희망고문’이라고들 한다. 희망이 고통스러워진 역설적 상황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도 마음속에서는 조직과 사회공동체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이 자라기 쉽다.

이것은 점점 많은 여성의 경험이 되고 있다. 여성 일자리가 비정규직화하고 있다고 우려할 만큼 여성들의 비정규직 비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혼 여성은 가사노동과 양육 부담까지 안게 된다. 낮은 결혼율과 저출산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지만 가족도, 사회도 불안과 부담을 나누어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없는 사회에서 합리적인 여성이라면 결혼과 출산을 망설이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3만 달러를 바라볼 만큼 잘살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으로 노동시간이 긴 나라다. 한국은 돈이 있어도 시간을 살 수가 없는 사회인 셈이다. 노동시간이 길어지면 여가는 지친 심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데 바쳐진다. 늦은 퇴근 시간에 즐길 수 있는 것은 술 등 밤문화뿐이기도 하다. 가정생활과는 이래저래 멀어진다. 여가 문화의 발전도 소비자들이 낮 시간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국은 GDP의 성장과 나란히 자살률도 증가하는 특이한 현상을 가지고 있다. 자살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능력주의와 속도에 대한 강요가 만들어낸 피로 누적과 삶의 의미 상실을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이렇듯 총체적으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자기 유지, 즉 자기 재생산도 버거운 상황인데 정책은 저출산, 즉 세대 재생산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사회 전반에 시간복지 증대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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