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출연자 자매 자살 사건의 피해자 어머니인 장수미(가명)씨가 스마트폰으로 보조출연자 관리업체 앞에서 1인 시위를 했을 당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보조출연자 자매 자살 사건의 피해자 어머니인 장수미(가명)씨가 스마트폰으로 보조출연자 관리업체 앞에서 1인 시위를 했을 당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성폭행 피해, 배상은 안 된다니?’ 기사를 읽고

여성신문 1359호에 보도된 ‘성폭행 피해, 법이 인정했는데 배상은 안 된다니?’라는 제하의 기사를 읽었다.

보조출연자로 일하던 여성이 성폭행으로 자살했고, 동생 또한 뒤따라 자살한 사건의 피해자 어머니가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재판부가 “강간 내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이나 강제추행 등 성폭행을 당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민법상 규정한 3년의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했다는 내용이었다.

성폭력 피해의 특수성을 감안해 우리 법은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의 경우 공소시효가 피해자가 성인이 된 때로부터 진행하도록 법을 개정했고, 장애가 있거나 13세 미만의 아동이 성폭력 피해를 입은 경우 공소시효 자체를 폐지했다. 개정된 성폭력특별법 등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증명할 수만 있으면 일정한 성폭력 범죄의 경우 가해자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가해자에 대한 형사처벌을 통해 국가는 사법정의를 바로세울 수 있고, 국민을 대상으로 성폭력범죄의 경우 가해자는 죽을 때까지 처벌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피해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민법은 상대방의 범죄행위로 피해를 입은 개인이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두고 있다. 단 그와 같은 권리 행사 기간을 무한정으로 줄 수는 없기 때문에 법적 안정성 차원에서 소멸시효 제도를 통해 ‘불법행위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그와 같은 불법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10년 이내에 권리 행사’를 하지 않으면 피해자로서의 권리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은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법언에 비춰보면 수긍할 수 있는 규정이다. 그러나 강력 성폭력 사건의 경우 공소시효 자체를 폐지한 개정법 취지 등에 비추어 볼 때 성폭력 가해자를 형사법정에서 단죄할 수는 있지만, 피해자로 하여금 유죄 판결을 받은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는 길 자체를 차단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

외국 입법례를 통해 우리 민법의 개정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본다. 독일 민법의 경우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30년의 소멸시효 기간을 두고 있다. 구체적으로 ‘사람의 생명, 신체건강 또는 자유의 침해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청구권은 피해자가 그와 같은 피해 사실을 인식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손해를 발생시킨 행위 때로부터 30년의 소멸시효에 걸린다’라고 규정해 생명, 신체, 건강 이외의 일반 계약상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기간을 10년으로 규정한 것과 명백히 구별하고 있다.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 즉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범죄다. 이 같은 범죄가 피해자에게 매우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야기하게 된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일반 재산상의 권리 침해와 동일하게 민법상의 소멸시효 제도를 적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우선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 범죄, 13세 미만자 성폭력 범죄, 장애인 대상 성폭력 범죄 등 일정 범위의 성폭력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폐지한 이상 해당 범죄로 피해자가 입은 개인적 피해에 대해 현행 민법상의 소멸시효가 중단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근본적으로는 현행 민법상의 불법행위 관련 소멸시효 규정이 침해되는 법익의 종류와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안 날로부터 3년, 있은 날로부터 10년으로 규정된 것을 침해 법익의 종류에 따라 소멸시효 기간을 30년까지 차등화해 합리성을 기해야 할 것이다.

민법 소멸시효 규정에 대한 개정 움직임은 2011년 ‘미성년 성폭력 사건’에 대한 소멸시효 정지 민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한 적이 있고, 19대 국회에서 김현숙 새누리당 의원(현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의 개정안을 통해서도 발의된 바 있다.

성폭력 가해자를 형사처벌할 수 있는데, 해당 범죄로 인한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없다면 누가 수긍할 수 있겠는가. 2013년 성폭력범죄 관련 특별법에 이미 공소시효 폐지 대상인 성폭력 범죄의 범위를 넓혔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국회와 정부가 서둘러서 불합리한 민법상 소멸시효 문제를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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