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마지막날인 10월 26일 북한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작별상봉에서 버스에 탑승한 남측 가족들이 북측 가족들과 헤어지며 손을 잡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마지막날인 10월 26일 북한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작별상봉에서 버스에 탑승한 남측 가족들이 북측 가족들과 헤어지며 손을 잡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금강산 혈육의 만남이 잘 끝났다. 혹여 비틀어져 만남이 이뤄지지 않을까 금강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조차 마음을 졸였다. 70년 가까운 기다림이 자칫 수포로 돌아가면 어쩌나. 그들은 이미 타들어간 검은 가슴으로 혈육을 만났던 것이다.

대화는 눈물뿐이었다. 그 시간에 그 긴 시간을 무슨 수로 축약하겠는가. 눈물만이 그 애간장 태우던 삶의 맥박을 상대에게 알리는 축축한 대화법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끌어 안아도 세월은 당겨 오지 않는 무심하고도 무심한 만남 아니었는가. 그래서 또 이렇게 막연히 헤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언약도, 약속도 없었다. 잠시 만나 얼굴을 본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들도 딸도 죽음이 와도 알릴 길이 없는 막막한 헤어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도무지 무슨 인간의 규칙인지는 누구도 해명하지 않는다. 문제는 만난 후유증으로 더 아프고 절망하고 더 울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뱃속에 아이를 두고 헤어진 남편과의 세월이 65년, 소설에도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이런 이야기를 역사 안에 가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치욕이다. 살짝 본 남편의 주름진 얼굴이 이 할머니에게 그리움으로 남을까. 그것은 그리움이라기보다 한이며 온몸이 조여드는 무엇인가에 대한 원망뿐이지 않겠는가. 인간에게 가장 본질은 혈육이다. 혈육만큼 아픈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혈육은 한마디 말 없이 뚝 떨어지게 하고 개인의 감정 또한 뚝 그치게 한 것이 70여 년이 흘렀으니 그렇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혈육은 핵보다 더 폭발력이 강하고 영원하다. 이들에게 지금이라도 서로 소식이라도 알리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 초인류적, 과학적 신세계 안에서 작은 배려 아니겠는가.

이번 만남의 주인공들은 모두 노인들이었다. 죽음이 가까운 이 노인들에게 이념이, 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나고 더 울고 있는 혈육들에게 편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공적 전화라도 할 수 있어 목소리라도 듣게 하는 배려는 최소 가치의 인간적인 문제다. 북쪽 적십자 위원장이 이산가족 상시 접촉과 편지 왕래를 약속했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또다시 70여 년을 기다리라는 말인가. 그것만은 결코 서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핵에 대해, 세계 리더들의 눈치와 기득권에 대해, 전쟁에 대해라는 모든 기본 문제보다 앞선 것이 혈육들의 갇혀 있는 울부짖음이다. 서서히 잦아지고 있는 울음에 대하여 바라보라. 서서히 잦아지고 있는 숨에 대하여 바라보라. 그들은 지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절대적이라는 이야기다.

이 지독한 슬픔을 모른 척하지 말아야 인간세상의 본질을 아는 인간들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다. 세계평화라는 말을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혈육들의 피가 다 마르기 전에 그들에게 최소한 기쁨이라도 주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런 치졸한 비극 종말이 이제는 막을 내려야 한다. 반드시 새로 쓰는 역사여야 하는 것이다. 비극종말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이 추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를 어떻게 쓰는 가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역사만은 기필코 만들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책임은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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