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출연자 성폭행 자매 자살 사건 어머니 인터뷰

보조출연 일하다 성폭행 당해

정신적 충격으로 언니 자살

동생도 뒤따라 목숨 끊어

소멸시효 만료 손배소 패소

“짧은 소멸시효 문제 많다” 비판

 

손배소에서 패소한 보조출연자 자매 자살 사건의 피해자 어머니인 장수미씨는 “법은 약자 편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또 “친고죄가 몇 년만 일찍 폐지됐어도 딸 대신 내가 가해자들과의 싸움을 이어갔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손배소에서 패소한 보조출연자 자매 자살 사건의 피해자 어머니인 장수미씨는 “법은 약자 편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또 “친고죄가 몇 년만 일찍 폐지됐어도 딸 대신 내가 가해자들과의 싸움을 이어갔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법은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 편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도 나왔겠지요. 성폭행 피해를 법이 인정해줬으니 그나마 속이 풀렸지요….”

보조출연자 자매 자살 사건의 피해자 어머니인 장수미(62·가명)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기각된 데다 소송 비용을 부담하라는 판결이 났으니 그의 속이 얼마나 새까맣게 탔을지는 미뤄 짐작이 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72단독 곽형섭 판사는 지난 8월 28일 장씨가 성폭행 충격으로 자살한 딸의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보조출연자 관리업체 직원 이모씨 등 12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민법이 규정한 3년의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추석을 이틀 앞두고 서울 은평구의 허름한 다세대주택에서 장씨를 만났다. 그는 “우리 딸들 만나보지 않겠느냐”며 기자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은은한 향 냄새가 났다. 방 한편에 차린 분향대에는 고인이 된 두 딸이 생전에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놓여 있었다. “아직 그대로 두신 거냐”고 묻자 장씨는 “저렇게라도 안 하면 내 눈에서 멀어질 것 같아서…. 누가 내 딸들을 기억해주겠느냐”고 쓸쓸히 말했다.

1년 전 여성신문 취재진이 장씨를 만나러 왔을 때 있던 분향대 그대로였다. 영정 사진 속 큰딸 은정(가명)씨와 둘째딸 은희(가명)씨는 빛나는 청춘의 모습이었다. 평범한 이들 자매는 왜 이런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야 했을까.

은정씨는 2004년 배우로 일하던 동생의 권유로 드라마 보조출연 일을 시작했다가 그해 12월 방송기획사 W사 직원 이모씨 등 12명을 성폭행,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2년 뒤 고소를 취하했다. 장씨는 “처음에는 진실을 밝히는 게 당연하고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딸이 조사받는 과정에서 진실을 밝히기가 힘들고 다시 그 사건을 기억하는 걸 참을 수 없어했다”고 전했다. 그만큼 고소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장씨는 “친고죄가 몇 년만 일찍 폐지됐어도 딸 대신 내가 가해자들과의 싸움을 이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은정씨는 공인중개사 학원에 다니고 치킨집에서 일하는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되돌아 오려 애썼지만 고소 취하 3년 만에 목숨을 끊었다. 2009년 8월 28일, 서른넷의 나이였다. 엿새 뒤 은희(당시 30세)씨도 “언니가 보고 싶다. 언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뇌출혈로 투병해오던 은정씨 아버지도 그해 11월 3일 숨졌다.

엄마의 가슴에 두 딸의 무덤을 묻은 지 벌써 7년째다.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약으로 버티는 날이 이어졌다. 하루에 40알도 넘게 먹었다고 한다. 불면증의 고통은 그만큼 컸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던 세월이었다. “간신히 잠들면 꿈에 애들이 나타났어요. 꿈에서 만나는 즐거움으로 맨날 잤죠. 술 취해서 자고, 약 먹고 자고, 너무 행복했어요. 잊히지 않더라고요. 에미가 어떻게 자식을 잊겠어요….” 장씨의 짓무른 눈가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다 2014년 초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판을 시작했다. 딸이 성폭행당한 사실만이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가해자들은 딸과 합의 아래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했다. 가해자들이 잡아뗄 때마다 엄마는 침이 바짝 마르고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법원은 이번 소송에서 “강간 내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이나 강제추행 등 성폭행을 당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시했다. 곽 판사는 그 근거로 은정씨가 생전에 쓴 일기장 등을 검토해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으면서 단순히 피해 과대망상으로 일기 등을 작성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방 한쪽에 차린 분향대. 고인이 된 두 딸이 생전에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놓여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방 한쪽에 차린 분향대. 고인이 된 두 딸이 생전에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놓여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손배소 패소 사실이 알려진 후 소멸시효가 너무 짧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당시 고소를 취하해 형사소송을 못 하게 됐고 민사는 이미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를 못해 가해자에게 민·형사 책임을 묻지 않는 사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장씨는 얼마전 개명을 했다. 법원에 낸 개명 사유서에 그는 이렇게 썼다. “네 사람이 살았는데 이 중 세 사람이 죽었어요.” 그는 기자에게 “보름 있으면 새 이름이 새겨진 주민등록증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 이름으로 살면 과거의 고통이 끊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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