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복지, 젠더로 접근하라 ④ 고독사·청년주거난 해결하는 ‘코아비타시옹’

1만5000명 사망한 대 폭염 이후 ‘노인 고립’ 사회문제로

노인·청년 함께 사는 ‘코아비타시옹’ 주거 대안으로 인기

청년 “불편해도 방값 싸” 노인 “말벗하며 외롭지 않아”

시립 노인 전용 레지던스에 청년이 함께 사는 모델도

 

노인 전용 레지던스에 함께 사는 엘리안씨와 베네카스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노인 전용 레지던스에 함께 사는 엘리안씨와 베네카스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프랑스 파리 도심에서 광역 급행전철인 RER C선을 타고 30여 분 가면 도착하는 비트리(Vitry) 시. 파리에서 대학을 다니는 젊은이들이 방값이 비싼 파리를 대신해서 많이 선택하는 도시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안 콜랑 베네카스(Anne Collin Venekas·23)씨도 지난해 8월부터 비트리에서 통학하고 있다. 26㎡ 크기의 방에 사는 베네카스씨가 매달 내는 방값은 90유로, 한화로는 12만원 정도다. 파리에서 비슷한 크기의 방값이 평균 800~900유로(105만~119만원)임을 감안하면 거의 10분의 1 수준이다. 베네카스씨의 방이 이렇게 저렴한 이유는 노인과 청년이 함께 사는 제도인 ‘코아비타시옹(cohabitation)’ 덕분이다.

어르신과 말벗 하면 한 달 방값 12만원

지난해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인 툴루즈를 떠나 파리에 온 베네카스씨는 “크기도 작고 별로 좋지 않은 방인데도 방값은 터무니없이 높아 깜짝 놀랐다”며 “다행히 비영리단체인 파리 솔리데르(Pari Solidaire·연대)를 통해 코아비타시옹에 가입해 방을 구했다”고 말했다. 베네카스씨의 경우, 한 지붕 아래서 방을 나눠 쓰는 기존의 ‘룸셰어링(roomsharing)’ 방식과는 달리 노인 전용 레지던스에 세 들고 있다. 파리 솔리데르와 비트리시가 지난해 도입한 새로운 세대 간 동거 방식이다.

베네카스씨 방은 비트리시에서 관리하는 노인 전용 레지던스인 ‘저스틴 델몬스’ 2층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혼자 사는 어르신 23명과 또래인 레아씨와 함께 살고 있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자, 양쪽으로 작은 화장실과 붙박이 옷장이 있었고, 현관 맞은편엔 주방시설과 전자레인지, 냉장고가 보였다. 왼쪽으로 돌아서자 과일과 물병이 놓인 식탁과 미술사 책이 쌓여 있는 책상,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도 놓여 있었다. 방 한쪽에는 샤워기와 세면대가 있는 욕실도 보였다. 혼자 살기 딱 좋은 쾌적한 원룸이었다.

 

코아비타시옹 이용자인 베네카스씨가 방에서 과제를 하고 있다. 26제곱미터(㎡) 크기의 원룸에는 주방시설과 욕실, 화장실이 구비돼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코아비타시옹 이용자인 베네카스씨가 방에서 과제를 하고 있다. 26제곱미터(㎡) 크기의 원룸에는 주방시설과 욕실, 화장실이 구비돼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방값이 저렴한 대신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평일에 이틀은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1시간 30분가량, 일요일엔 3시간씩 노인들의 말벗을 해드려야 한다. 베네카스씨는 “간호사나 주방 직원 등 레지던스에서 일하는 분들이 퇴근을 하면 어르신들이 허전함을 느끼시는데, 나와 레아가 거실이나 강당에서 어르신들과 대화를 하며 허전함을 달래드린다”고 설명했다.

지난 1년간 코아비타시옹을 경험한 그는 또다시 기간 연장을 신청해 이곳에 머무르게 됐다. 그만큼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베네카스씨는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도 좋지만 그보다 타지에 와서 계속 대화를 하고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었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럽다”고 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파리의 야경도 즐기고 싶고, 저녁에 친구들과 만나고도 싶은데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 때문에 불편할 때가 있다. 한번은 시설 담당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간 적도 있었다. 또 어르신과 인간적으로 교류하는 점은 좋지만 주 관심사가 달라 대화를 이어가기 힘든 면도 있다. 초반엔 ‘넌 여기 뭣하러 왔느냐’ ‘쓸모없다’는 말도 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분도 있다.”

 

노인 전용 레지던스인 PNF에 사는 여성들이 공동 공간에 모여 뜨개질을 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노인 전용 레지던스인 PNF에 사는 여성들이 공동 공간에 모여 뜨개질을 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 곁에 있어 만족”

이곳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엘리안(81)씨는 “젊은이들이 곁에 있는 것이 참 좋다”며 “예전에는 직원들이 퇴근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방에 들어갔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부터는 공용 거실에 오래 남아 대화를 나누는 일이 늘었다”고 말했다.

70여 명의 노인이 함께 사는 레지던스 ‘PNF’에서 만난 르네(73)씨도 “성격에 따라 청년들과 함께 사는 것을 불편해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갈등 없이 잘 지낸다”며 “젊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외로움도 줄고 더욱 활기차지는 것 같다”고 만족해했다.

프레도(65)씨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사는지 관심을 가져주고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참 좋다”며 “오랫동안 음악을 해왔고 힙합이나 랩 음악도 듣기 때문에 젊은이들과도 크게 세대 차이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까지 자동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다 비트리 시 공무원의 도움으로 이곳 레지던스에서 무료로 지내고 있다.

 

비트리 시 소속 공무원이자 노인 전용 레지던스 담당자인 캐럴 레스고슬레스와 산드린 레독스씨(왼쪽 부터).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비트리 시 소속 공무원이자 노인 전용 레지던스 담당자인 캐럴 레스고슬레스와 산드린 레독스씨(왼쪽 부터).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저스틴 델몬스 시설 담당자인 캐럴 레스고슬레스(karelle Lesgosles)씨는 “코아비타시옹 도입 전후를 비교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노인들의 생활 패턴”이라며 “이전엔 직원들이 6시에 퇴근하면 노인 대부분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지만 제도 도입 후엔 청년들과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고 방에 늦게 들어간다”고 했다. 이어 “또 다른 코아비타시옹 이용자인 레아가 석 달간 노르웨이로 인턴십을 떠났는데 할머니들이 ‘레아 어디 갔느냐’ ‘보고 싶다’고 묻고, 레아도 이메일로 할머니들의 안부를 묻는 모습을 보면서 사이가 돈독해졌다는 것을 느낀다”고 전했다.

PNF 담당자인 산드린 레독스(41)씨는 “현재 비트리 시에서 관리하는 노인 전용 레지던스 4곳에서 코아비타시옹을 도입했다”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 시작해 청년들이 어르신들에게 IT기기 사용법을 알려드리기도 하고, 함께 여가 생활을 즐기는 등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노인과 청년 사이의 유대가 형성됐다는 점이 놀라웠다”고 했다. 레독스씨는 현재 비트리 시 사례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파리 근교 지방자치단체의 문의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후원=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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