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원들이 지역구의원 추천 시 전국지역구총수의 100분 30 이상으로 추천 개정 하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ㆍ여성신문
12일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원들이 지역구의원 추천 시 전국지역구총수의 100분 30 이상으로 추천 개정 하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ㆍ여성신문

1980년대 지금의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소위 ‘(대입) 학력고사’를 준비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문과 학생들은 ‘정치경제’와 ‘국사’를 포함한 시험 필수과목을 공부해야 했다. 당시 우리가 공부하던 과목의 책들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손때가 덜 타서 새하얗게 되는 경향이 있었으니 그중 유독 심한 과목이 ‘정치경제’와 ‘국사’였다. 소위 현대정치와 국사 중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현대사는 교과서의 유동적인 부록에 해당했으니 시험문제에서 공공연히 암묵적으로 제외되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현대사, 현대정치는 감히 학생들이 경험하고 관심 있게 공부해야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다. 학교에서 정치혐오는 학습됐고, 역사는 늘 암기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다.

최근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과 관련해 논의가 활발하다. 제19대는 국회 여성 의원 비율이 15.7%로 역대 가장 많다. 그러나 국제의원연맹(IPU)에 따르면 2015년 6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전 세계 190개국(평균 22.2%) 중 83위(16.3%)에 불과하다. 이러한 비율은 여성에 대해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아랍국가(19.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1년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 의원의 수를 확대하기 위한 방안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논의 중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여성 국회의원을 늘리기 위한 제도는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에 규정돼 있다. 비례대표 여성 할당 50% 규정은 일종의 강제 조항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을 위반했을 시의 벌칙은 지방선거에만 적용될 뿐 국회의원 선거에는 마련돼 있지 않다. 지역구 선거 여성할당제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무제가 아니다. ‘정치자금법’에 근거한 여성추천보조금제가 마련돼 있기는 하다. 현행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제19대 국회에는 비례대표 국회의원 50% 여성할당을 위반한 경우의 벌칙조항 마련, 지역구 국회의원 30% 여성할당 의무화를 내용으로 하는 법안이 발의돼 있다.

국회에서 최소한의 성별 균형이 이뤄지기 위해 현재 가능한 방안은 비례대표 의석수를 확대하고 그중 50%는 여성에게 주어져야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여성 정치인의 양적 확대에 관해서만 논의가 이뤄질 뿐 힘없는 대한민국의 여성, 약자를 사랑하는 포용력 리더십, 용기와 추진력을 갖춘 자를 어떻게 양성해 공천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점이다. 늘 선거 시기가 되면 여성정치인을 급하게 ‘발굴’하려고 하다 보니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명망가, 재력 있는 자, 단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전문가 등 중심으로 공천되거나 비례대표에서 유리한 순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정치가 학교에서, 일상에서, 직장에서 논의되지 않고 혐오의 대상이 되며 성역할 고정관념 속에서 “저 여자는 정치적 야망이 있는 사람이야”라는 평가는 여성성을 상실하고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비치며, 그 여성을 “한 방에 훅 가게 하는” 멘트가 되기도 했다.

17대, 18대, 19대 국회의 공천 과정과 여성 의원들의 국회의원이 되기 전 직업을 분석해 보면, 공천이 형식적으로는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이뤄지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정당 내 역학관계에 따라 이뤄지는 경향이 짙었다. 더불어 시민사회단체 출신의 여성 국회의원이 많았던 17대 국회는 기득권층으로 분류되는 전문직, 직능대표 출신이 많았던 18대 국회보다 여성 의원들의 입법활동이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 모두에서 훌륭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공천을 둘러싼 당내 역학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남성 정치인(소위 ‘오빠’)을 따라다니지 않고 대한민국 여성들(소위 ‘언니’)을 따라다니는 사람과 힘없는 자들을 대변하는 시민사회 단체 활동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일상의 교육과정을 통해 양성되는 구조, 공익을 우선시하는 청렴한 자가 걸러지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공천제도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정치혐오가 혐오되고 여성들도 공공선을 향하는 권력 의지를 갖도록 교육되는 학교, 정치적 지향과 정체성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다양한 정당들의 존재,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에 맞는 정당에 일찌감치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 역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정치가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는 교육. 너무 이상적일까?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과 성평등(gender equality)이라는 의제가 조화를 이루기 위해 ‘비례대표 확대’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의 정당 후보 추천 시 여성을 30% 이상 추천하도록 의무화’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병행돼야 할 것은 포용력 있고 진취적인 여성 정치인을 키워낼 뿐만 아니라 검증해낼 수 있는 제도를 튼튼하게 구축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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