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틱한 난민의 삶에 매료돼

각자 단체 세운 동반자이자 경쟁자

우린 모두 ‘이방인’… 난민에 대한

색안경 낀 시선부터 바뀌어야

 

남매처럼 꼭 닮은 박진숙·김종철 부부가 콩고 에서 온 미야 가족의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남매처럼 꼭 닮은 박진숙·김종철 부부가 콩고 에서 온 미야 가족의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5년간의 고시공부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남편이 난민을 돕는 공익변호사를 본업으로 삼겠다고 선언한다면? 서울대를 졸업한 후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뒷바라지를 한 아내라면 적극 찬성하기 어려운 일이다. 수임료가 아닌 후원금을 쪼개 생활해야 하는 공익변호사의 삶이 그리 안정적이지도, 풍족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박진숙(41) 에코팜므 대표는 남편 김종철(44)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의 선언을 받아들였다. 물론 한두 달 고민할 시간은 필요했다. 하지만 20년간 곁에서 지켜본 남편은 ‘과신중병’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중한 사람이었고, 박 대표는 그런 남편을 누구보다 신뢰했기에 남편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김 변호사가 공익변호사의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분이기도 했다. 법무법인을 다니며 ‘반쪽’ 공익변호사로 난민을 돕던 2009년, 아내가 소송 의뢰인인 난민들과 친구가 되면서 이들을 돕기 위해 에코팜므를 설립하는 모습에서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열일곱, 스물에 처음 만나 25년을 같은 방향을 보고 살아온 부부의 눈은 늘 서로를 향해 있었다. 인터뷰 내내 아내가 말을 할 때면 지그시 바라보는 김 변호사의 눈빛도 그랬다. 난민 지원에 앞장서는 이 부부가 최근 가나안농군학교 창설자 일가 김용기 선생의 삶과 사상을 기리는 제7회 청년일가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부부가 이 상을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수상 소식에 “얼떨떨하면서도 참 기쁘다”고 담백한 소감을 말했다.

-청년 일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박진숙 “부모님과 친지분들 30명이 함께 하는 가족여행 중에 수상소식을 들어서 온 가족의 축하를 받았다. 40대라 청년인지, 중년인지 애매한 나이인데, 청년이라고 못 박아 주시니 좋더라. 아마 저희 나이가 마지노선이지 않았나 싶다.”

-‘난민을 돕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 반대는 없었나.

김종철 “부모님께선 속으론 서운하실지 몰라도 한 번도 내색은 안 하셨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예전에 한 번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은 난다. 방송사 촬영팀과 방글라데시 난민 실태조사를 하러 갔다가 경찰에 억류된 장면이 방송에 나간 거다. 장인어른이 절 알아보시고 ‘도대체 뭐하고 다니냐’고 걱정하신 적은 있었다.”

박진숙 “시부모님은 지식인이시라 난민 지원이 어떤 일인지 잘 아시지만, 농부인 친정부모님은 난민이 뭔 지도 잘 모르신다. 남편이 변호사가 된 지 얼마 안됐을 때 중고 프라이드를 샀는데, 친정아버지가 보시고 ‘차가 이게 뭐냐’고 하시더라. 검정 세단을 기대하셨던 거다. 딸 입장에서는 두 분을 이해시키는 게 조금 어려웠다. 그래도 이렇게 매체 인터뷰 기사가 날 때마다 보여드리면 저희가 하는 일이 이상한 짓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부부가 같은 일을 하니 천생연분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겠다.

김종철 “요즘도 그런 진부한 표현 쓰나. 하하.”

박진숙 “저는 남편을 최고의 경쟁자이면서 협력자라고 말한다. 제가 먼저 단체를 만들었기 때문에 초반엔 영수증 정리하는 법도 알려주고 설립자로서 어려움도 서로 나누면서 시행착오도 줄였다. 열일곱 살에 스무 살인 남편을 만났는데 그땐 남편 글씨체까지 따라할 정도로 우러러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는 동반자이자 경쟁관계다.”

김종철 “저는 경쟁심은 별로 없었는데 아내에게 도움은 많이 받았다. 결정적으로 어필을 시작할 때 쯤 다니던 법무법인에 후원 제안서를 내놓은 상태였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공익 트랩으로 가야하고, 후원으로만 운영이 가능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때 아내가 에코팜므 시작하는 걸 보고 ‘하면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기더라.”

-전업 공익변호사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김종철 “아내는 제가 하는 일에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던 사람이다. 사법시험을 그만둔다고 해도, 그렇게 하라던 사람이 공익변호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으로 반대하더라.”

박진숙 “남편은 제가 농담처럼 ‘과신중병’이라고 할 정도로 정말 신중한 사람이다.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이 우리 집 가장이다보니 솔직히 처음에는 바로 ‘하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 두려움이 있었다. 한두 달 고민하다보니 나도 에코팜므를 덜컥 시작했는데 남편이 하는 일을 반대한다는 게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김종철 “사법시험을 보고 가족이 함께 2년 반 동안 강원도 양양으로 내려가 일종의 공동체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시험에 합격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있었을 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떨어져서 농사짓고 사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는데 살아보니 너무 좋았다. 이런 모험이 처음이 힘들지, 그 다음은 쉬운 것 같다.”

박진숙 “당시에 마지막 사법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시험결과가 나오기 전에 양양으로 내려갔다. 첫째가 아토피도 심했고, 저도 도시 생활에 지쳐있는 상태라 시골로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때였다. 하숙생처럼 공부만 하던 남편이 아빠, 남편의 자리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자연 속에서 지낸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그래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법연수원 입소를 2년 미루기도 했다. 그때 양양에서의 2년 반이라는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어릴 때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박진숙 “중학교 3학년, 초등학교 6학년인 두 아이는 우리 일로 인한 희생자이자 수혜자인 것 같다. 엄마가 세탁소 옆에 작은 자리를 얻어 페인트칠을 하고 그곳에서 난민 여성들과 리본핀을 만드는 모습은 어린 아이들의 눈에는 리본핀 장사처럼 보였던 것 같다. 리본핀을 팔고 생긴 돈을 ‘우리 돈’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의 일을 이해시키는 데 꽤 오래걸렸다. 사실 시간도 정신적인 에너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쓰다 보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손해를 본 셈이다. 그래서 이젠 조금 덜 바쁜 내가 근무일도 줄이고, 행사도 줄여 아이들에게 조금 집중하려고 한다. 얼마 전에 연 인종차별 세미나에 딸이 참석해 질문도 하기도 하고, 엄마를 격려해주기도 해 힘이 된다.”

-처음 난민 지원을 하기로 결정한 계기는.

김종철 “난민 지원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법무법인 소명에서 일하면서 프로보노로 난민 소송을 하면서, 난민들의 용기 있고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매료됐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때 제 제안서를 본 동료 변호사 두 명이 각각 1000만원을 시드머니(종자돈)로 내게 건넸다. 큰돈을 선뜻 내놓은 마음도 고마왔지만, 그들이 ‘그 돈으로 어필 세우지 않고 유럽여행을 다녀와도 좋다’고 말할 때 반대로 ‘어필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박진숙 “욤비 토나씨 영향이 제일 컸다. 남편이 콩고에서 온 욤비씨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제가 불어를 전공했다는 이유로 대화를 나누고, 통번역을 맡게 되면서 그들의 삶에 빠져들고, 매료됐고, 친구가 됐다. 특히 2008년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행정소송을 할 때 법정에서 통역을 맡으면서 강한 임팩트를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이주여성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한글교실 선생님이 되고, 난민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이주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긴 거다. 친구가 되면서 이들의 문화적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에 재능을 살린 예술작품으로 자립을 돕는 에코팜므를 세우게 됐다.

(박진숙씨는 욤비 토나씨와 함께 그가 난민 인정을 받기까지 과정을 담아낸 『내 이름은 욤비』를 썼다. 에코팜므는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서 온 이주여성을 상대로 상담과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예술적 소양을 발굴·발전시켜 창의적 작품 활동까지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 단체다. 이주여성들이 만든 아트상품과 수공예상품을 전시·판매도 한다.)

-에코팜므를 설립한 지 7년, 어필은 5년이 됐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김종철 “최근에 3년 10개월 간 구금됐다가 유엔자유권위원회에 개인청원을 제기해 구금에서 풀려나고 극적으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란인이 있다. 한국에 온 지 10년 만에 난민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오랫동안 갇혀있으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과 전화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마주 앉아있어도 할 말이 있으면 ‘잠깐만요’하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 전화로 말 할 정도였다. 이 분이 감옥과 비슷한 수준인 열악한 보호소에서 창문이 없는 방에 있다가 밖이 보이는 방으로 옮겼을 때 ‘달을 볼 수 있고, 놀랍게도 비가 내리는 것도 볼 수 있다. 그 전에는 겨우 들리는 빗소리에 행복해 하려고 애를 썼지만, 이제는 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고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박진숙 “콩고에서 온 미야는 제게 가장 힘을 주고 기쁨을 주는 친구다. 남편의 의뢰인이었던 미야와 친구가 됐고, 지금은 에코팜므 직원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 미야가 한 인터뷰에서 내게 고마운 점으로 ‘항상 거기 있다(She’s always there)’는 점을 들더라. 떠나지 않고 늘 곁에 있어서 고맙다는 말인데, 나도 항상 곁에 있는 미야가 고맙다. 우리의 ‘소셜미션’을 잘 이해해주는 이런 동료가 있어 일도 내 마음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2011년 난민법이 시행됐지만, 박해를 피해 한국에 온 이들에 대한 난민 인정 기준도 까다롭고, 어렵게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도 평범한 삶을 꾸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종철 “외국인 노동자는 법적으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난민은 한국에 정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본국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돌아가기도 쉽지 않고, 한국에 적응하면서 정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한국 사회와 소위 통합 ‘통합’돼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하려면 교육과 취업이 제일 중요하다. 하지만 난민들이 자신의 전공이나 재능, 경험을 살려 교육을 받거나 취업할 수 있지 못하다. 전공과는 상관없이 공장 일을 하며 적은 월급을 받는 난민이 대부분이다. 난민은 네트워크가 없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일할 수 있는 권리, 의료보험 가입할 수 있는 권리, 요건이 되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하지만 정보를 잘 알지 못해 기초생활수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난민법 시행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보면 난민법을 가졌다는 것 말고 무슨 진보가 있었나하는 의문이 든다.”

박진숙 “미야가 내게 ‘정치적 핍박을 피해 한국에 왔는데 한국에선 도덕적 핍박이 있다’고 하더라. 난민법이 제정돼 난민 관련 예산이 늘었지만, 예산의 80~90%는 영종도에 있는 출입국 외국인 지원센터(난민지원센터) 운영에만 쓰이고 있어 안타깝다. 캐나다와 일본의 난민 정착 프로그램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매우 열악한 수준이다. 일본에서는 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잡페어’를 열어 고용자, 구직자를 위한 설명회를 갖는다. 대다수 난민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전문직 종사자들도 많다. 이들이 가진 재능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

-난민 소송은 이기기도 힘들고, 각기 케이스도 달라 매번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나.

김종철 “어필을 시작하기 전에는 고민이 많았는데, 어필을 시작하자마자 그런 고민은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지금하는 이 일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진숙 “남편은 신중하고 준비기간도 있었기 때문에 후회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그야말로 훅 뛰어들어서 ‘맨땅에 헤딩’을 하다 보니 재정적 위기와 함께 심리적 위기도 몇 차례 겪었다. ‘무슨 영화를 보려고 내가 이걸 하고 있나’라는 고민도 했다. 그때마다 미야 같은 친구가 곁에서 큰 버팀목이 돼줬다.

-앞으로의 계획은.

김종철 “어필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 달린 댓글을 보면 인종주의적인 글이 많다. 신문기사 댓글은 더 심각한 수준이다. 인종주의를 뿌리뽑으려면 장기적인 싸움이 될 것이고, 그럴려면 보다 전략적이고 창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난민영화제를 열고, 인식제고를 위한 교육도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특별한 목표보다, 재미있게 일하는 것이다. 단기적으론 외국인 어선원의 인권침해에 대해 연구하고 제도개선 활동을 하려고 한다.”

박진숙 “일단 작업실 겸 사무실 얻을 생각이다. 에코팜므의 목표가 사람을 키워, 리더로 세우는 것이다. 첫 번째 사례가 미야인데, 에코팜므 10주년 때는 이주여성 3명을 스태프로 고용해 함께 일하고 싶다. 장기적으로는 이주여성이 에코팜므 대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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