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암 이겨내고 50세의 삶 노래 “암 투병 중 노래가 써지더라… 난 딴따라”
“연말에 콘서트… 200·300석 규모 공연 자주 열 것”

 

안치환은 “노래를 지은 일도 암 투병을 하는 뮤지션의 권리였다”며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육체적 고통과 불안 속에서 노래가 써지더라. 난 역시 딴따라였다”고 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치환은 “노래를 지은 일도 암 투병을 하는 뮤지션의 권리였다”며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육체적 고통과 불안 속에서 노래가 써지더라. 난 역시 딴따라였다”고 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전사 김남주 시인이 감옥에서 시를 썼다면 안치환(50)은 암 투병 도중 병상에서 노래를 지었다. 정맥에 구멍을 뚫어 케모포트를 심고, 항암제를 맞으면서…. 그가 직장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486 팬들은 누구보다 놀랐을 것 같다. 50년간 기름칠해 가며 쉴 틈 없이 돌려온 몸이 보내온 구조 신호. 암이 그런 의미라면 안치환의 투병은 묵묵히 성실하게, 어쩌면 바보처럼 일만 해온 486세대에겐 결코 남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이여, 감사합니다”

암과 싸우면서 5년 만에 정규 앨범 ‘50’을 만든 안치환은 7일 서울 연희동 자택 지하 스튜디오 ‘참꽃’에서 이뤄진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뜻밖의 농담을 건넸다. “올해 1월에 복원수술 받았고 내일이 딱 6개월 되는 날이네요. 복원수술 하면 2년간 괴롭다고 해요. 평생 직장(職場) 없이 살았는데 이젠 직장(直腸) 없이 살게 됐어요.”

수척한 얼굴의 그가 웃는 대로 따라 웃긴 쉽지 않았다. 4번의 수술, 6주간의 방사선 치료, 12번의 항암치료. 몸무게가 67㎏에서 53㎏까지 빠졌을 만큼 암 치료는 ‘산 넘어 산’이었다. 오죽했으면 그가 “죽다 살아났다”고 했을까. 처음에는 앨범 이름도 ‘부활(Rebirth)’이라 지으려 했다.

‘나는 암환자’ ‘병상에 누워’는 대중가요로선 다소 가사가 세다. 원래 삶과 인간을 노래해온 안치환의 음색은 애잔하고 가슴 뭉클한데 11집은 더 격정적이다. 평론가 서정민갑의 말대로 안치환 자신이 노래가 됐기 때문이다. 가슴 절절하다 못해 불에 데일 듯 뜨겁다. 그는 “정작 이 노래로 위로와 희망의 에너지를 받는 사람은 나 자신”이라며 “나에 대한 응원가이자 희망가”라고 했다.

“내 목숨 주인은 암이 아니라 널 이겨낼 나라는 걸 내가 몸으로 보여주겠어”(‘나는 암환자’) 같은 가사는 ‘그래, 나는 386이다’ ‘나는 노래하는 노동자다’의 연장선상에서 암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처럼 들렸다. 안치환은 “노래를 지은 일도 암 투병을 하는 뮤지션의 권리였다”며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육체적 고통과 불안 속에서 노래가 써지더라. 난 역시 딴따라였다”고 했다. 그는 연말 콘서트도 준비 중이다.

11집 에필로그에는 “백 분의 수녀님들에게 감사드린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허락된 삶을 살겠다. 삶이여,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연을 물었더니 “몸이 아픈 후 아는 수녀님에게 연락이 왔다. 수녀회에서 100명의 수녀님들이 매일 기도해주신다더라. 참 고마웠다”고 했다. 옐로카드가 레드카드가 되지 않도록 담배도 끊고 술도 꽤 줄였다. 그러면서 기자에게 “이제 암 이야긴 그만하자”고 했다.

“친한 친구 녀석이 내가 병 걸리기 1년 전에 혈액암으로 5개월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어요. 차라리 존엄한 죽음을 맞았으면 좋았을 걸 정신없이 치료받다 그냥 갔어요. 이 고통을 겪고도 치료가 안 되는 분이 많은데 내가 함부로 이야기하면 다른 암환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잖아요.”

-9집을 낼 때 지리산 반야봉에 오른 느낌이고 10집은 천왕봉 정도 된다고 했었어요. 11집을 낸 지금의 소회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넘긴 기분입니다. 언론에 ‘인생 2막을 열다’로 보도됐지만 제가 한 말은 아니에요. 11집은 거친 바다 인생을 건너려고 디딤돌 놓은 거죠. 제 길을 가는데 징검다리 하나 놓은 거죠.”

-원래 11집 앨범으로 따로 녹음한 게 있다면서요.

“맑고 깨끗한 포크음악을 만들어뒀는데 바뀌었지요.”

 

안치환은 다소 수척해보였지만 1시간30분짜리 인터뷰를 거뜬히 소화할만큼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치환은 다소 수척해보였지만 1시간30분짜리 인터뷰를 거뜬히 소화할만큼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삶과 인간을 노래해온 저항가수

-1번 트랙 ‘사랑이 떠나버려 나는 울고 있어’는 대중과의 소통에서 느끼는 갈증을 담은 곡이에요. ‘내 사랑엔 유효기간 없어 단지 네가 사라졌을 뿐야’라는 가사가 인상적입니다.

“사실 뮤지션으로서 대중과의 관계에 업 앤드 다운(up & down)이 있어요. 뮤지션은 신선함이 생명인데 데뷔 10년쯤 지나면 익숙해지고 진부해질 수 있어요. 그렇다고 싱어송라이터인 제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생존 자체가 뮤지션에게 절박할 때가 있어요. 예능에 출연하지 않고도,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지 않고도 견뎌내기 쉽지 않은 환경이죠. 묵묵히 음악의 길을 걷기가 쉽지만은 않아요. 뮤지션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당당하게 살아남아야죠.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자 훈장 같아요.”

안치환이 486세대를 대변하는 가수가 된 것은 그의 인생 궤적이 486과 닮아 있기 때문일 거다. 민중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대학에 입학한 486세대가 얼마나 될까. 대학에 들어와 80년 광주를 만나고, 시위에 참여하다, 결국은 골수 운동권이 되어 ‘공활’(공장 활동)을 경험한 이 세대의 행로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는 얘기다.

그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해 중·고교 때 소풍 가면 단골로 나와 노래를 부르곤 했다. 노래 잘하는 청년 안치환은 연세대에 입학한 후 노래패 ‘울림터’ 활동을 시작으로 시대를 거스르는 노래인 민중가요와 만나게 된다. 안치환은 “그때까지 전혀 듣지 못했던 새로운 노래였다. 내용도 기존의 대중가요와 전혀 달랐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그는 ‘새벽’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거쳐 1989년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시위를 하다 투옥된 선배를 생각하며 만든 ‘솔아 푸르른 솔아’는 지난 89년 방송 사상 처음 인기가요로 꼽혀 화제를 낳았다.

안치환은 민중가요의 특성이었던 집단의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이야기를 포크 록으로 표현했고 ‘내가 만일’ ‘소금인형’ 등을 히트시키며 대중에게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싱어송라이터로 많은 히트곡을 내며 ‘기타 메고 하모니카 부는 포크가수’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특히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열린음악회’나 촛불집회에서 모두 자연스레 불릴 만큼 국민 애창곡이 됐다. 안치환은 지난 97년 밴드 ‘자유’를 결성하면서 더욱 탄탄해진 록 어법을 구사한다. 이 노래는 ‘안치환과 자유’만의 음악적 질감을 완성한 5집 앨범에 실려 있다.

-‘내가 만일’은 4집 출시를 앞두고 막차를 탄 노래라고 들었어요. 그 노래가 ‘효자’가 됐네요.

“우연히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듣게 된 노래였어요. 처음에는 앨범에 삽입할 계획이 없었어요. 4집에서 제가 만든 앨범을 음반사에 가져다 줬더니 이러더라고요. ‘다 좋은데 안치환씨, 방송에 틀 노래가 없어요. 방송에 틀 노래가. 3분 이내의 노래를 한두 곡만 추가해주세요.’ 자존심이 상했지만 알았다고 했지요. 그때 건축가 겸 음악인인 양진석씨를 만났는데 저한테 노래를 하나 들어보라는 거예요. 누구한테 받았는데 직접 부르기엔 안 어울리고 제가 부르면 어울릴 것 같다고 했던 노래가 바로 ‘내가 만일’이에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도 이렇게 히트할 줄 몰랐다면서요.

“이 노래는 가사가 빨리 돌아가서 입에 붙기가 쉽지 않아요. 일반 대중가요와 가사가 다르지 않나요?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까란 의문은 있었지만 그 벽을 깨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노래가 되어서 굉장히 쾌감을 느꼈어요.”

안치환은 특히 시를 노랫말로 하는 많은 명곡을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시인 정호승과는 인연이 깊다. 2008년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앨범도 발표했다.

“선생님과 오랫동안 같이 작업했어요. 우리가 아는 보수는 영혼이 없는 수구세력인데 따뜻하고 품위 있는 보수가 정호승 선생님이죠.” 그의 노래 ‘자유’는 정호승 시인이 김남주 시인의 ‘자유’를 낭송하는 걸 듣고 만든 노래다. 안치환은 정호승과 김남주가 만났다면 서로를 존중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김남주와 정호승이 극과 극이라고 생각하지만 두 분이 만났다면 좋아하셨을 거예요. 김남주는 우리가 아는 전사 이미지뿐 아니라 엄청나게 아름다운 서정성을 갖고 있어요. 사람이 극단적인 건 반대의 모습도 함께 지녔기 때문이죠. 김남주가 그렇듯 격정적인 시를 썼다는 건 이면에 따뜻한 자아도 있었다는 이야기예요. 정 선생님도 직접 뵈면 여성스럽지만 실은 굉장히 남성적인 면모가 있어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시도 쓰셨지요.”

 

안치환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나를 대중가수로 만들어준 노래라면 ‘개새끼들’은 뮤지션으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준 노래”라고 했다. 밥그릇 앞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내용의 노래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치환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나를 대중가수로 만들어준 노래라면 ‘개새끼들’은 뮤지션으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준 노래”라고 했다. 밥그릇 앞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내용의 노래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486과 함께 늙어가며 신곡 내놓겠다” 

안치환 자신도 그런 양극단을 오간다. ‘내가 만일’의 안치환과 ‘철의 노동자’를 쓴 안치환은 결국 같은 사람인 것이다. 지킬과 하이드처럼 인간 내면의 복잡다단함을 어떻게 단순화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한때 그가 사랑가를 불렀다고 해서 “변절했다”고 비판했다.

-직접 최고의 노래를 꼽는다면 어떤 노래일까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저를 대중가수로 만들어준 노래라면 ‘개새끼들’은 뮤지션으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준 노래예요. 밥그릇 앞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내용이죠.”

그는 기자와 이야기하며 “민중가요라는 말이 싫다”고 했다. 자신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민중가수로 불리는 게 싫다니 의외네요.

“민중가요는 서민, 곧 민중이 향유하고 그들이 받아들여서 직접 부르는 노래죠. 그런데 지금 민중가요를 서민들이나 국민이 부르고 있나요? 그냥 운동권 가요라고 하는 게 정직한 거죠.”

그러면서 10여 년 전 어느 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여성 노동자 체육대회에 초청 가수로 갔다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안치환이 무대에서 여성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니 분위기가 싸늘해졌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보다 근로자로 불리기를 원하는 게 현실이다. 쇳물을 녹이고 무지막지한 현장에서 망치질하는 사람만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안치환은 “그때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노동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나 역시 노래하는 노동자 아니냐. 지배계층의 계급적 노림수에 휘둘리지 말았으면 한다”고 했다.

11집 앨범 표지는 대학생 아들 세진씨가 그렸다. 고등학생 때 그린 펜화인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아들의 그림이란다. 잎이 무성한 두 나무가 서로 줄로 연결돼 있다. 그는 “사람들이 자꾸 묻길래 아이에게 물었더니 관계를 표현했다더라. 두 사람이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준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오래 노래하고 싶어요. 그게 제 삶이니까요.” 안치환은 앞으로 200∼300석 규모의 작은 콘서트를 자주 열 생각이다. 대형 무대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팬들과 더 자주 만나고 싶어서다. 그와 함께 청춘을 보내고 중년의 문턱을 넘어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꾸준히 내놓겠다고 했다. 그 세대는 곧 안치환과 같은 ‘바람의 영혼’들이니까.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아무도 박수쳐주지 않지만 /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꿀 수 있는 것만으로도 / 거친 바다 인생의 강물을 건너는 난 머물지 않는 바람의 영혼.”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