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부터 길 카페로 유명한 안목해변에 카페 잇따라 생겨
아담하고 호젓한 카페, 솔숲 너머 조용한 카페 ‘눈길’
사실 나에게 강릉은 꽤 오랫동안 바다였고, 달이었다. 그뿐이었다. 밤이면 호수에 하나, 바다에 하나, 너의 눈동자에 하나, 내 마음에 하나, 술잔에 하나. 다섯 개의 달이 뜬다는 곳이다.
완행열차를 타고 밤을 새워 달려 마침내 당도하면 파도가 반겨주던 곳. 파도가 사람들의 흔적에 가려지지 않고 제소리를 낼 수 있는 겨울이 끝날 무렵의 바다는 얼마나 싱싱하던지. 봄밤 달이 깊어지는 때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마시던 소주 한 잔은 얼마나 친절하던지. 삶의 많은 고민과 해결되지 않을 걱정을 그곳으로 가 파도에 실어 보내곤 했다. 이렇게 바다와 달만으로 강릉으로 떠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요즘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바로 카페다.
커피 한 잔이 가져다준 인생의 풍요
이제 동네마다 작은 카페 하나쯤은 있는 그런 시대가 됐다. 게다가 지금의 카페는 예전처럼 갇힌 공간이 아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카페는 온전히 자신의 감성과 사유를 누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 되었다. 처음부터 카페는 이런 공간이었어야 했다. 미팅을 하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숨어드는 공간이 아닌, 담론과 문화가 있는 열린 공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처럼 개인 작업실이 될 수도 있고,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알텐베르크가 느꼈듯 집보다 아늑한 곳, ‘해리포터’를 쓴 조앤 롤링의 경우와 같이 아이와 언 몸을 녹이며 희망을 도모할 수도 있는 그런 공간이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카페들은 제법 제자리를 찾은 듯하다. 그리고 때론 육아로 지친 엄마들에게 마음의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된 것도 같다.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아를 찾을 수 있는 따뜻한 공간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많은 엄마들에게 집에서 마실 수도 있는 커피 한 잔 값은 아까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마시고 버려지는 커피 한 잔이 아닌, 지친 영혼을 치료하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카페가 주는 인생의 사치를 누리기에 강릉은 매우 은혜로운 곳이다. 카페들이 이어져 카페 거리라 부르는 안목해변을 비롯해 대부분의 바닷가에 수많은 카페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이와 바닷가 카페 나들이
파도 소리를 벗 삼은 커피 자판기들이 늘어선 안목해변은 이미 30년 전부터 길 카페로 유명했다. 바닷가를 걷다 동전 몇 닢으로 따스한 커피를 한 잔 할 수 있는 매력적인 해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해가 갈수록 늘었다. 그 시절 안목해변 커피 자판기가 더욱 인기를 끌었던 것은, 자판기마다 그 맛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자판기마다 각각의 바리스타를 두었던 셈이다. 시간이 흘러 자판기가 있던 자리에 카페가 들어섰다.
이국적인 그리스풍의 산토리니를 시작으로 카루소, 커피커퍼와 스타벅스, 카페베네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공존한다. 어느 곳이라도 좋다. 어느 곳이든 그 옛날 길카페의 자판기들이 그랬듯 친절하게 낯선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그러나 요즘 내가 마음을 빼앗긴 곳은 사천항에서 영진항을 거쳐 주문진으로 향하는 해변가에 늘어선 카페들이다. 테라로사, 브라질 같은 유명한 카페들 말고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펜션 1층에 자리한 아담하고 호젓한 카페나 솔숲 너머 숨어 있는 조용한 카페들이 많다. 어느 곳이든 커피 맛도, 분위기도 달라 같은 위치에 있어도 카페마다 전혀 다른 바다를 만나는 느낌이다.
바닷가 카페를 찾을 때 가능하면 아이와 동행하려고 한다. 지금은 초등학생이 된 아이의 유아기 시절. 육아가 제일 어려웠던 때, 언제나 예의주시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도대체 언제쯤 이 아이와 단둘이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18개월쯤 서투르지만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스케치북에 낙서를 시작한 그날, 나는 드디어 카페로 향했다. 마침 그날은 사는 게 한결같고, 일상이 남루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의 손이 닿은 벽지가 뜯겨졌고, 거울 속 내 머리도 반은 뜯겨나간 듯 엉망진창이었다. 일상의 때를 벗겨야만 했다. 박박, 시원하게. 묵은 각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날을 맞고 싶었다. 그날 나는 아이와 함께 카페로 갔다. 동네 카페에는 대학생 커플과 회의 중인 듯한 직장인 몇이 보였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가득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주스 한 잔을 놓고 시간을 보냈다. 물론 역시 조용히 독서하기는 좌절되고 말았지만, 빨간색 파란색 크레파스를 들고 아이와 마구 낙서하며 스트레스가 풀렸다. 남루했던 일상의 때가 벗겨지고, 색이 입혀지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까닭 없이 짜증이 나거나, 이유 없이 남과 비교하며 인상 쓰게 되는 날이면 조용히 가방을 챙겨 카페로 가곤 했다.
그렇게 카페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 모녀는 어느 곳을 여행하든 카페에 들르는 걸 즐기게 됐다. 꼭 여행지가 아니라도 동네 카페에서 더 새롭고 특별한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구경하며 한나절을 보내곤 한다. 그것이 낯섦을 경계하는 아이에게도 도움이 되고, 울타리 밖 세상이 간절한 나에게도 좋은 시간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강릉의 아름다운 바다와 달 사이사이에 300여 개의 카페가 숨은 듯 자리하고 있다. 이제 강릉은 매년 커피 축제가 열릴 정도로 우리나라 커피 문화를 선도하는 지역이다. 물론 카페가 강릉의 전부는 아니다. 바다와 사람들의 삶의 공간 사이에 메워진 솔숲 그리고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자취, 오죽헌과 경포대, 7번 국도, 박물관과 미술관들, 바닷가 사람들, 역사와 문화 등 온갖 다양한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골고루 숨쉬고 있는 곳이 바로 강릉이다.
그러나 하루쯤 자기 자신에게 조용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면 다른 어느 곳보다 먼저 카페를 찾길 권한다. 그곳에서 커피향과 유리창 너머 밀려오는 파도와 그 사이에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길 바란다. 다른 것을 보는 여행이 아닌, 자신을 찾는 여행에 카페가 있는 강릉은 완벽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