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과했던 여성 소비자 다시 보니 ‘황금알’

상품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여성을 타깃으로 삼은 제품들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남성 영역으로 여겨졌던 분야에서도 ‘젠더’를 고려해 탄생한 브랜드를 통해 여성과 남성 모두를 아우르며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등 산업계의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 13일 서울 서초구 더팔래스호텔에서 열린 제4차 과학기술 젠더혁신포럼에서는 국내 산업계 젠더혁신 사례로 ‘LG 포켓포토’가 소개됐다. 이 제품은 잉크 없이도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바로 인화할 수 있는 휴대용 포토 프린터다. 특히 지난해 출시된 ‘LG 포켓포토 헬로키티 에디션’은 상품 기획부터 디자인, 마케팅까지 여성에 초점을 맞춰 제품이 만들어졌다. 개발 파트를 제외한 상품기획, 디자인, 마케팅 등 포켓포토 관련 인력 상당수도 여성 직원으로 구성됐다. 주요 타깃인 20·30대 여성들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통해 선호하는 캐릭터를 찾았고, 헬로키티가 최종 낙점됐다. 휴대성을 높이고, 파우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제품 두께는 24㎜에서 20㎜로 줄였다. 본체 이외에도 파우치, 포장박스 등 제품 관련 아이템도 여성들의 취향에 맞게 3~4회씩 수정 작업을 거쳤다.

상품 기획을 담당한 유하나 LG전자 과장은 “캐릭터 라이선스 업체와 로열티 가격과 계약 문제로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했고, 파우치 제작 업체에서 품질을 맞추지 못해 직접 중국 공장까지 찾아간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남성인 임원진에게 제품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며 “하지만 대만과 태국, 중국 등 해외에서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젠더를 고려한 연구와 기술개발이 새로운 시장의 가치를 창출한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브랜드가 ‘질레트’다. 남성용 면도기 전문 브랜드인 질레트는 여성과 남성의 신체 차이를 탐구해 성별 구분 없이 사용하던 면도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여성용 면도기 ‘질레트 비너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비너스는 여성은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겨드랑이, 종아리 등을 면도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해 머리 부분을 360도 회전이 가능하고 몸통 부분은 남성 면도기보다 더 길게 구성했다. 젠더를 고려한 결과, 2001년 출시 이후 여성용 면도기 시장에서 50% 이상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자동차 업체 볼보는 동승자로서의 여성이 아닌 운전자로서의 여성을 고려한 자동차 ‘YCC(Your Concept Car)’를 세상에 내놔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볼보는 여성의 수요를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총괄 책임자를 비롯해 개발팀 인력의 절반 이상을 여성으로 배치해 기획·설계·제조까지 여성적 관점을 전폭 반영해 제작했다. 진짜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자동차인 셈이다.

이날 포럼을 주최한 박영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젠더혁신’을 위한 시작이자 뿌리라면, 연구개발·산업·정책 각 분야에서의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성장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 원장은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서 ‘젠더혁신’은 이미 선언적 구호가 아니라 연구개발, 산업, 정책 영역에서 실천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실제 스웨덴의 기술혁신청(VINNOVA)은 산업 클러스터 5곳에 젠더혁신을 지원해 클러스터의 성장을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