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활동가들이 직접 쓴 여성인권 이야기
도시 빈민운동 하는 필리핀의 마리아, 불가촉 천민운동가인 인도의 베다나야기
가부장적 성문화에 도전하는 지혜롭고 용감한 여성들의 이야기

 

차우파디 폐지를 요구하는 네팔 시민들. 대법원은 월경 중인 여성을 격리해온 이 제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 역시 네팔 여성운동의 결실이다.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차우파디 폐지를 요구하는 네팔 시민들. 대법원은 월경 중인 여성을 격리해온 이 제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 역시 네팔 여성운동의 결실이다.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우리의 신념과 지식은 때론 눈을 가리고 시각을 뒤틀며 생각을 막아버린다. 아시아 여성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이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아시아 여성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결혼이주자 혹은 이주노동자로 이미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종종 미디어를 통해 그들에 대한 끔찍한 인권유린을 전해 들을 때마다 불편하고 아픈 마음으로 그들을 떠올린다.

“가엾고 불쌍한 여성들, 도와주어야 할 여성들.” 손수건을 통해 때론 눈물을 닦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거기에서 멈추어 버린다. 누군가를 동정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동정은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전제한다. 불평등은 무시, 신체적 폭력, 편견, 낙인과 같은 폭력의 자원이 된다.

그래서 아시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인권 문제를 전한다면서 그들을 가난한 여성, 그리고 가엾은 폭력의 피해자로 묘사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목소리1-아시아의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의 현장』(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기획, 장필화‧이명선 엮음, 이대출판부)은 서구나 한국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활동가들이 직접 전하는 여성인권에 대한 이야기다. 방글라데시 카지는 아동 결혼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짚어준다. 결혼이 사적인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인도네시아 카니스는 전통 안에서 ‘간성애자(Intersex)’를 성스러운 성으로 여겼고 족장의 취임식에 축복을 해줬다는 이야기를 통해 아시아가 섹슈얼리티에 대해 편협하다는 편견을 깨고 있다, 미얀마의 잉은 분쟁에 의한 생활고에 밀려 시장이나 공원에서 인신매매되는 어린 소녀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필리핀의 마리아는 철도공사 때문에 주거권이 박탈된 도시 빈민운동을 하는 운동가다. 그는 빈민 여성들과 연대해 대기업 편을 들어주는 정부와 싸울 뿐 아니라 도시 빈민자를 불법 거주자, 게으름뱅이, 범죄자, 기회주의자로 보는 사회적 시선과 싸워 권리를 회복해 가는 이야기를 전한다. 사랑가는 스리랑카에만 3만5399명이 사망한 쓰나미 이후 재난관리 구조를 개선하고 복구해온 이야기를 한다. 가족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성들의 재난 대응 능력을 개발하고, 오히려 취약한 여성들의 역량을 강화시켜서 사회변혁의 주체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전한다.

방글라데시 샤미마는 라나 플라자 참사사건 이야기를 전한다. 이미 붕괴가 경고된 건물에 반강제적으로 들어가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이미 참담한 노동착취 구조 안에 있었다. 빈번한 성희롱, 심지어 20%가 넘는 여공들이 일터에서 성관계를 경험했다는 보고는 위계적인 공장에서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성 착취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인도의 베다나야기는 불가촉 천민운동가다. 그는 “지렁이의 눈 높이에 맞게 몸을 낮추고” 농업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기업화된 농업, 상위 카스트 남성들의 만행 등에 분노하지만 공동체 예술을 통해 그들 단체 이름처럼 산들바람 같은 대항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인 활동가들의 이야기도 함께 나온다. 서남아시아 남성과 결혼한 정주영은 스스로 겪은 이야기를 통해 다문화 정책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는 우리나라가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국가임을 면면이 드러낸다. 또 청소년을 위한 성인지 교육을 하는 활동가 이목소이는 다양한 실천 교재를 개발해 스스로를 지키며 자기결정권을 갖출 수 있는 성교육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여성의 성적 실천과 관심을 ‘걸레’라고 낙인찍고 남성의 실천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성문화에 도전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아시아 여성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깨닫게 된다. 그들이 얼마나 지혜롭고 용감한지, 그리고 그들이 지치지 않고 꿈을 꾸면 아시아 인권이 나아가야 할 지도를 그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통을 희망으로 일구어내는 여성들의 힘겨운 싸움과 거친 숨결이 느껴진다. 강하고 지혜로운 친구가 필요한가? 아시아 활동가들이 여기 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