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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의 생산주임이 열여섯의 소녀 둘을 포장마차,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힌

다.

“춥지?”

목이 자라목같이 쑥 기어들어가 목소리조차도 함께 들어간다. 주임이 자기 옷을

벗어줄 시늉을 한다. 두 소녀가 불안과 긴장과 징그러움과 수치감으로 더더욱 꼭

붙는다. 그걸 생산주임이 유심히 관찰한다.

“왜, 내가 너희들 잡아먹을 호랑이로 보이냐?”

호랑이라면 덜 징그럽기는 하겠다, 란 생각을 한다. 호랑이처럼 무섭기만 한 것이

면 차라리 낫겠다, 란 생각도 한다. 그러면서 행여라도 주임 손길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이쪽으로 다가올까봐 덜덜 떤다.

“그건 아니겠지? 너희들 나 너무 나쁘게 보지 마라. 나도 인간이다. 너희들 보면

다 내 동생같고 딸같고 그렇다. 어서 먹어라.”

기분 나쁘면 경상도 사투리를 억세게도 쓰다가 기분 좋으면 다시 서울말을 쓰는,

그래서 더 믿을 수 없는 남자다. 주임이 홍합국물 그릇을 밀어준다. 이미 그가 몇

번 숟가락질을 했음은 물론이다. 목구멍 속에서 울컥 구토가 일어날 것 같다.

“왜 안먹어? 다른 거 시켜줄까?”

잔뜩 졸아 있는 소녀들 앞에서 혼자 말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기분 내며 혼자

시끄럽다. 발은 시렵고 집에 돌아가 빨리 연탄불도 피워야 하고 따뜻한 이불 속

으로 들어가 눕고만 싶은 생각에 두 소녀는 거의 울음이 다 나오려고 한다.

“좋다, 좋다, 내가 너무 내 기분에만 취해 있어가지고, 얼른 나가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골목 입구에서 주임을 향해 공손히 인사한다.

“안녕히 가세요.”

“집이 어디야?”

엉겁결에 골목 안을 가리키다가 내민 손가락 끝이 얼른 구부려진다.

“그래? 밤길 조심해라. 안되겠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 주마.”

“아니예요. 저희끼리 갈 수 있어요.”

“무슨 소리, 내가 아직 미쓰오한테 사과도 못받았잖아. 사과도 받을 겸, 낮에 있

었던 일 미안해서 마음의 빚도 갚을 겸해서 말이야. 다 동생같아서 그러니까 너

무 신경쓰지 마.”

주임이 먼저 앞장을 선다. 어떡해야 하나. 열 여섯 은자와 필순이 서로를 마주본

다. 다른 집 앞으로 가서 거기가 집인 것처럼 하고 거기서 주임을 돌려보내기로

한다. 몇 발짝 떨어져 걷는 소녀들 곁으로 주임이 다가온다.

“어때? 회사는 다닐만 해?”

소녀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내가 야학엘 못가게 한 건 말야, 다 너희들을 위해서 그런 거야. 생각해 봐라.

야학에 나간다고 너희들 인생이 바꿔지냐? 정식 학교도 아니고 그런데 백날 나가

봤자 시간만 낭비하는거야. 차라리 그 시간에 열심히 일해 한푼이라도 더 벌어서

정식 학교를 다녀야지. 어때, 이 오빠 말이 맞냐 틀리냐?”

어느새 ‘오빠’가 된 주임.

“저기요, 다 왔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

“아, 그래? 가만 있어보라. 내가 숙녀들 집에 초대받아서 빈손으로 왔는데 이거

미안해서 어떡허나? 연탄불은 꺼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제 그만 가보시란 말이 욕지기처럼 밀려 올라온다. 알지도 못하는 집 대문 앞

에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주임이 그만 덜컥 나무대문의 쪽문을 밀고 들어간다.

두 소녀가 그 길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친다. 그녀들이 세 살고 있는 방

까지 달려오는데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당장의 상황은 어떻게 모면

하긴 했지만 진짜 문제는 내일 생산주임의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일이다. 열여섯

두 소녀가 밤새내 고민을 한다. 문득 은자가 죽어버리자는 말을 한다.

“이렇게 살 바에야 우리 죽어버리자.”

죽어버리자는 말의 슬픈 파급력에 또 두 소녀가 밤새 서러움에 목이 잠긴다. 기

껏 이만큼 살다 가려고 태어났나 싶은 서러움이다.

다음 날, 모진 칼바람을 뚫고 두 소녀가 가리봉동 네거리를 걷는다. 새로운 일터

를 찾기 위함이다. 80년의 봄이 공장의 담 너머, 너머 어디쯤에서부터 오고 있다.

그녀들이 애기 엄마가 되기 오륙년 전의 풍경이다.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

가 될지 까마득한 채로 두 소녀가 구로공단에 입성한다. 공장을 옮기는 단 하나

의 이유, 생산주임의 얼굴을 마주하기 무서워서다. 정말로 그녀들 얼굴 마주하기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구로공단, 와이셔츠 공장에서의 오년의 기억은 접어두기로 한다. 그 오년이 그 이

전 오년보다 더 행복했는지 더 불행했는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더 나았다고 할

것도 더 나빴다고 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시간들만은 아니었음에도 성수동에서

보냈던 때가 더 선명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가 그나마 그만큼 세상에 덜 상처

입었던 때문은 아닐까.

전병순의 스쿠터를 타고서 원촌으로 오은자가 원하는 ‘톡 쏘는 것’을 사러 가

는 길이다. 밤바람이 서늘하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다. 바람냄새를 맡으니 그

걸 알겠다. 도시에서는 계절이 바뀌는 걸 내내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거리

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다든가 찬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 사람들 옷차림

이 눈에 띄게 바뀌어 있을 때 계절을 느끼고는 하는데, 시골에서는 바람냄새라든

가 풀잎의 미세한 흔들림, 흙의 감촉 따위만으로도 계절의 기척을 알아챌 수가

있다. 작고 여린 것들, 미세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을 느끼는 것, 그렇게 세상을 주의 깊게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비단 오

영란 혼자만의 열망만은 아닐 것이다.

‘톡 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사이달까? 콜랄까? 두 사람이 한참을 머리 맞

대고 어려운 숙제 풀듯 고심하다가 술까지 덤으로 사서 싣고 축사집으로 돌아왔

다. 그 사이 강필순이 깨어 있었다. 두 사람이 원촌을 나간 사이 집에 남은 두 사

람은 또 그들 나름대로의 대화가 있었던 듯 느껴지는 것이 강필순의 얼굴에 잠기

운도, 술기운도 한참 전에 달아난듯 싶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나가기 이전 이미

깨어 있었던 듯도 했다. 영란이 사온 것들을 개봉하여 각자의 앞으로 돌리고 나

서 아무도 외치지 않는 건배를 혼자 외쳤다. 하여간 분위기 파악 못하고 사오정

같이 돌출행위 하는 데는 스스로도 자신이 ‘푼수’임은 확실한 것 같다는 생각

을 하며 머쓱한 기분에 혼자 웃는데 구름을 벗어난 달도 영란을 따라 입이 째지

게 웃는 것 같다. 옛날 어머니들한테서 이야기 듣듯 오은자 얘기나 더 듣고 싶었

다. 곗꾼들이 한방에 그득 차서 뭔가를 맛나게 먹어가며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잠이 들었던 어린 시절이 영란에게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바로 그때 그 방이 흔히

말하는 곗방인 셈이다. 언젠가는 분식장려운동의 일환으로 요리강습을 나온 여자

가 하얀 가운을 입고 요리시범을 보이는 방에 모인 젊은 아낙들의 수다를 너무나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도 난다. 이야기 듣는 것 좋아하는 습성이 그때부터 생겨난

것일까.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속설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필시 부자

로는 절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부자로 살지 못할거라는 그 생각 자체가

오히려 영란은 행복하다. 오은자의 강요된 가난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가난 사

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는 걸까. 강요된 가난 앞에서의 선택한 가난이란 그것도

그저 또 하나의 사치일 뿐일 것인가.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은 왜 그다지도 ‘강

요된 가난’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은지 모르겠다. 부자들의 이야기

는 너무 재미가 없다.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생의 ‘슬픔’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아름다움이고 진실이다. 슬픔이 없는 인생이란 헛인생이다. 슬

픔이 없는 예술이란 모두 가짜다.

“노래나 한자리씩 합시다.”

오은자가 건배를 외치고 나서 머쓱해져 있는 영란의 기를 살려줄 셈이었는지 노

래부르기를 제안한다. 스스로 제안하고 스스로 먼저 목청을 돋군다. 열아홉 순정,

댄서의 순정, 갈대의 순정, 오은자의 순정메들리가 한 바퀴 돌고 나자 전병순의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헤일수 없이 가나긴 밤을 어쩌고 할 때부터 어쩐지 목소

리가 불안하더니 두 소절도 다 못하고는 해당화 피고지는이 시작되는 듯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구서 긴밤 지새우고로 넘어간다. 그러고 시끌짝한 통에 강필순

의 아이가 깨어났다. 눈을 감은 채로 비칠비칠 엄마 품을 파고든다. 강필순이 좀

조용히 하라고 파락 신경질을 낸다. 천하의 음치 전병순이 딴에는 분위기 맞춘다

고 눈조차 감고 열심히 부른다고 불렀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타박을 맞는다. 아이

는 금방 잠든다. 이번에는 전병순이 신경질을 낸다.

“아거, 애새끼는 집에다 좀 놔두고 오쇼 거. 애아빠 뒀다 뭐에 쓰려고 그래. 내

가 전화해 줘요?”

“그러시든지.”

“진작에 그러셨어야지 원. 한참 잡은 분위기 다 깨졌구마는. 아, 여보세요? 거기

산이네 집 맞지요? 뭐라구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 여보세요, 저 귀 안먹

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큰소리 안치셔도....... 아, 네. 알겠습니다.”

영란과 필순의 눈이 전화통 앞으로 몰린다. 오은자만 여전히 몽롱한 눈빛으로 바

다에 떠가는 한 점 기선같은 달을 바라보며 뭐라고 뭐라고 낮은 목소릴로 노래를

한다. 세상에 천둥번개 쳐도 내 눈 하나 감아버리면 그 또한 남의 세상일이 아니

고 무엇이랴. 오은자가 보이는 행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너무 많은 고통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남의 고통에 둔감할 수가 있다. 왜냐면 그 고통의 깊이를 알

기 때문에 섣불리 끼어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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