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30대 여주인공 ‘한나’

 

10대 소년 ‘마이클’은 길을 가던 중 열병으로 인해 심한 구토를 일으키고 우연히 소년을 지켜본 30대 여인 ‘한나’의 도움을 받게 된다. ‘마이클’은 감사 인사를 청하기 위해 그녀를 다시 찾아가고 순간 그녀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며 비밀스런 연인이 된다. 마이클이 책 읽는 소리가 섹시하다며, 매일 책 읽기를 청하는 여자.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한나’에 대한 ‘마이클’의 마음은 점점 더 깊어지게 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바람처럼 한나는 마이클 곁에서 사라져버린다. 

주인공 한나는 마이클에게 없는 또 한 가지의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가 문맹이란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존심이 센 그녀는 차마 누구에게도 자신이 문맹이란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문맹이란 콤플렉스가 오히려 시나 소설 같은 인문(人文) 자체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배가시키는 보상 행위가 된다. 

마이클이 한나와 사랑을 나눈 후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하자 그녀는 무심하게 ‘무슨 소릴 하는 거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이클이 학교에서 배운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시를 읊자 “아름다워”라고 감탄의 말을 연달아 내뱉는다. 때론 인간에게 식스팩에 팔등신 남자보다 시를 읊어주는 남자가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법이다. 

 

한나는 자신의 지독한 콤플렉스와 과거를 감추려, 어떤 경우라도 상황에 대한 통제 능력 혹은 장악력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녀의 단호한 몸짓과 표정은 사실 자신의 열정을 감추고 자존심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한나의 심리적 역동은 개인적인 자장 안에서는 마이클과의 자질구레한 충돌을, 법정에서는 전후 세대와 사회와의 비극적 마찰음을 일으키는 동인이 된다. 

예를 들면 한나와 사랑에 빠지게 된 마이클은 내심 그녀의 키스를 기대하며 일부러 열차의 뒤칸에 올라타지만, 검표원인 한나는 앞 칸에서 뒤 칸에 올라탄 마이클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 그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이런 그녀는 훗날 목숨이 달려 있는 순간에도 융통성 없는 방법으로 자존심을 구하려 든다. 유대인 수용소의 간수였던 그녀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도 끝까지 ‘감시인’의 신분을 충실하게 이행하려 들었다고 주장할 뿐이다. 경직된 그녀의 사고 틀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겠지만.    

특히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하는 자신에게 직면하기보다, 방어기제로 회피를 사용하면서 계속 도망 다닌다. 한나는 글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무직 승진을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기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굳이 어린 소년인 마이클을 성적 상대로 택한 까닭도, 그녀의 마음 깊숙이 가족제도나 가부장제도를 회피하려는 욕구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한나에게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은 단지 ‘글을 모른다’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한나 쪽에서 보자면 문맹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독립과 자존을 포기하고 이 거대한 사회에 무릎을 꿇는 일이었으리라. 당연히 그녀는 법정에서 자신이 문맹임을 자인하고 목숨을 구하느니, 평생 감옥에서 썩는 쪽을 택한다. 

수십 년이 지나 마이클이 자신의 목소리로 한나에게 그 옛날의 책 읽기를 다시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 또 다른 한나의 손에 또 한 권의 책을 쥐여줄 방법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인간으로서 인간다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인문의 길이고, 진정한 자존감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성찰과 용기 있는 사과를 가능케 하는 이 인문의 길 위에 놓여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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